[이상요의 미디어 속으로]

장면 1: 목동에서

보도교양프로그램 심의를 위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입주하고 있는 목동 방송회관으로 화요일마다 간다. 이곳이 지난 1월 중순경부터 시끄러워졌다. JTBC가 최순실의 태블릿PC 보도를 조작했다며 이를 심의하라고 요구하는 보수단체의 시위 때문이다. 이들은 한때 1층 로비도 점거했다가 물러나 지금은 건물 밖에서 시위 중이다. 목동 주민들도 조용하던 동네가 시끄러워지니까 신기하다고 한다. 경찰이 건물 출입을 통제해 드나들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는데 심의위가 임시출입증을 발급해줘 요즘은 사정이 나아졌다.

어버이연합 회원이 서울 마포구 JTBC 사옥 앞에서 ‘태블릿PC 입수 경위 촉구’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장면 2: 여의도에서

2월 초 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는 방송문화진흥회가 위치한 여의도 율촌빌딩 앞에서 차기 MBC 사장 선출을 중단하라는 기자회견을 했다. 방문진은 오는 23일 임시주총에서 새 사장 선임을 마무리한다는 일정을 진행시키고 있다. 기자회견에서 비상시국회의는 “공영방송 MBC를 박근혜 정권의 대변자로 전락시킨 방송농단의 주범인 방문진은 사장을 선임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방문진 야당 추천 이사들은 방송관계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므로 사장 선임 일정을 늦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방문진법(방송법 포함) 개정안은 여야 6대 3 구조인 이사회 구성을 7대 6으로 바꾸고, 사장 임명에는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 특별다수제 도입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여당 이사들이 다수결 제도를 이용해 정권 편향적인 인사를 공영방송 사장으로 선임해왔던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특히 개정안에는 법안 처리 후 공영방송 이사진과 경영진을 3개월 이내에 교체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어, 법이 개정될 경우 이달 중 방문진이 사장 선임 절차를 완료하더라도 방문진 이사진이 전원 교체되어 새 사장을 뽑아야 한다. 이 때문에 더더욱 여당 이사들이 차기 MBC 사장 선임 일정을 서두르려 한다는 관측이다.

언론단체비상시국대책회의 참가자들이 10월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비상시국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장면 3: 지하철에서

지하철을 타거나 이동 중에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매달리는 모습은 이제 일상적 풍경화가 되었다. 나도 그렇다. 중학교 동창 모임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한 친구가 카톡 문자메시지를 열심히 나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지하철을 같이 탔던 친구였다. 내용을 보여주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의 말씀 요약본’이라 되어 있었다. 헌법재판소에서의 육성 내용을 글로 정리한 거란다. 대통령 탄핵소추는 절차상 하자이므로 위헌이라는 내용이었다. 헌재소장이 언제 이런 말을 육성으로 했는지, 글을 작성한 사람은 누군지도 밝히지 않았다. 언론이 대서특필할 만한 내용이었는데 그런 보도는 전혀 없었다. 조금 있으니 내가 공유하는 단체 카톡방에도 그 내용이 떠돌기 시작했다.

©픽사베이

근대국가는 미디어의 ‘공론장’ 기능을 기반으로 구축됐다

사적 개인들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구성하는 담론공간으로 ‘공론장(public sphere)’ 개념을 내세웠던 사람은 하버마스다. 그에 따르면 근대국가 이전까지는 절대왕정 및 교회가 내세우는 가치와 신념이 유일하게 ‘공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체제가 무너지면서 ‘공적 권위’는 궁정과 교회에서 분리된다. 구체제를 전복시킨 부르주아 계급은 정확한 정보 전달을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공론을 형성해 ‘공적 권위’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즈음 부르주아 계급이 합의한 공론은 사유재산과 인권 등의 사적영역이 기본권으로서 부당한 침해로부터 보호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하버마스가 주목한 것은 정보전달 매체로서 언론이 담당한 공론 기능이었다. 유럽 근대국가 형성기에 ‘공적 권위’에 대한 개념이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사회가 성립되고, 궁정과 교회를 대체한 국가와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중간영역으로 ‘공론장’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버마스는 주장한다. 이것이 ‘부르주아 공론장’ 개념이고 기능이다.

사적 개인들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구성하는 ‘공론장’은 구체제를 무너뜨렸다. ©플리커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는 선전수단이자 광고매체로 전락했다

그러나 시장기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고 국가권력이 지속적으로 확장된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공론장 기능은 축소되고 말았다. 정치적 정당성의 원점이었던 공론장이 대중조작·대중동원의 선전수단으로 전락했고, 언론매체는 대중소비문화의 촉진제이자 광고매체로 전락했다. 일부 권력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만들어낸 의견과 가치를 대중에게 선전하고, 피드백을 받아 이를 다시 여론화하는 방식을 일반화시켰다. 언론은 공론장이 아니라 왜곡의 통로가 되어버렸고, 개인은 공적 토론에 참여하는 주체적 시민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의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했다. 많은 언론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공론장은 국가권력과 거대자본에 의해 재봉건화 과정을 밟고 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이런 경향이 태동했으며, 하버마스는 이를 ‘생활체계의 식민화’로 개념화했다.

장면 1과 2는 이런 현상의 퇴행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다. MBC를 통해 그동안 공론이 어떻게 왜곡되었으며, 장면 1과 같은 사례가 여론 형성에 어떻게 활용되는지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장면 2는 국정농단으로 온 나라가 출렁이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이를 시정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강고한 벽에 부딪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픽사베이

SNS는 새로운 사이버 공론장이다

정치엘리트에 의한 대중조작의 확대, 급격히 왜곡되고 축소되어버린 공론장의 정치적 기능, 사생활중심주의에 매몰된 시민들의 정치적인 무관심이라는 ‘생활체계의 식민화’가 최근 전환되고 있다는 조짐이 뚜렷하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SNS를 기반으로 게이트키핑이 해체되고 자유로운 상호작용 커뮤니케이션이 일상화되었다. 사회적 담론에 무관심했던 젊은 층이 대거 공론장 형성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 흐름은 빠르게 중장년층에게 전이되었다. 정보사회가 고도화되면서 사이버 공간을 기반으로 공론장 기능이 복구될 것이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서울시장 선거나 4월 총선은 정당이나 거대 언론매체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를 가져왔다. SNS를 기반으로 새로운 형식의 공론장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픽사베이

누가 사이버 공론장을 무력화시키는가

장면 3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최초의 작성자와 콘텐츠 내용의 진위를 가리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전파되는 SNS 내용이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개별적인 내용 하나하나의 진위 여부도 문제지만, 새롭게 부상한 사이버 공론장을 권력과 자본 그리고 이에 부역하는 일부 세력이 또 다시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가짜뉴스(fake news)가 횡행하는 작금의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짜뉴스 제작 앱도 출시되었다. 자극적이고 흥미를 끌 수밖에 없는 소재를 활용해 진짜뉴스보다 가짜뉴스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사례도 많다. 의도된 목적을 가지고 유포시키는 가짜뉴스는 현행법 위반 소지가 많지만, 작성자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혐의자를 적시하기도 어렵다.

주체적 시민들이 공론장을 활성화시키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주류 미디어들이 선전도구로 전락한 상황에서 SNS는 디지털 기술이 마련해준 공론장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다. SNS라는 사이버 공간을 지키고, 공론장으로 활성화시키기 위해 SNS 사업자나 시민들이 이를 훼손하는 세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다. [오피니언타임스=이상요]

 이상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분과 위원

  전 <KBS스페셜> 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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