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서대문에서 큰 길을 건너면 안산에 이르는 길에 바로 닿는다. 안산은 높이가 295.9m로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무악재를 이루고 조선건국 초기 도성 터로 거론될 만큼 명산이다.
안산은 말이나 소의 안장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조가 무악재 고개를 넘을 때마다 아버지 숙종의 명릉(明陵)을 바라보며 그 생전을 추억했다 하여 추모재라고도 불린다.
몇년 전 구청에서 새 길을 내어 바닥에 나무를 깔고 목책을 세워 편안한 자락길로 단장했고 요즘은 서울의 명소가 됐다. 내가 안산을 걷기 시작한 것은 병원 신세를 지고 난 직후였다.벌써 5년이 넘었다.
질병은 본래 분자의 일탈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고향에서 집안 일로 분주히 뛰어 다니던 어느날 갑자기 복통이 나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몇가지 검사를 하더니 대장암이란다.
암은 이렇게 아무 예고도 없이 절벽처럼 나에게 다가섰다. 바로 내 옆에서 오랫동안 엿보고 서성이고 있었나 보다. 단 한번의 노크도 없이 불청객으로 무례히 찾아와 내삶을 폭풍처럼 흔들어 버렸다. 어쩌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행이 될 것만 같았고,처절한 절망이 나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수술 후 2 년, 파란 하늘에 솜털 구름이 얇게 펴진 어느 날. 3개월 마다 받던 검진이 관리를 잘한 덕에 1년 주기로 받게 될 것 같은 황홀한 꿈을 꾸던 날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수술조차도 할 수 없는, 복막으로 암이 전이됐다고 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 절망이 들풀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한결같이 5년여 안산 길을 오르내렸다.이젠 눈을 감고도 찾아 걸을 수 있을 만큼 됐다.
안산 길엔 가문비나무(독일), 국수나무, 팥배나무, 화벽나무,배롱나무, 산 벗나무, 진달래, 산수유, 야생 감나무, 연산홍, 개나리를 여기저기 심어 놓아 사시사철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랜다.하늘 높이 솟은 메타세쿼이아 가지 사이로 흰 설편(雪片)이 춤추듯 휘날릴 때면 염려와 근심, 미움과 분노, 절망과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감사와 환희, 사랑과 소망, 평화와 행복이 텅빈 내 영혼을 감싼다.
무척 서러웠던 날 늦은 오후 안산을 찾았다. 길은 어둑어둑하고 날씨는 싸늘한데, 오가는 인적도 드물어 내딛는 걸음이 무거운 밤길, 등이 까맣고 배가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나에게 불쑥 다가와 바지에 몸을 비빈다. 날마다 곧 쓰러질듯이 기진맥진해 걷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일까.말은 하지 못해도 내 앓는 소리를 고양이가 고스란히 들었던 걸까.모처럼 평화로운 밤을 보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찾아 이 어두운 광야를 황망히 달려왔는지. 수수깡같은 욕망과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신기루같은 행복을 찾아 천근만근 무거운 삶에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성공과 실패, 건강과 질병, 풍요와 궁핍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더 유익한 지 그 분별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히 한 중고 서점에서 ‘운명’(임레 케르테스)이 눈에 띄었다. 15~6세의 철모르는 소년이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 등을 전전하면서 겪은 이야기다. 가장 비인간적인 세계 가운데서 인간의 조건에 대해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그가 내적 자유 하나만 소유한 채 운명을 버텨낼 수 있던 것은 삶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사회의 모순된 구조와 억압 속에서도 운명이 없다고 부르짖을 수 있는 인간은 정말 위대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고통받지 않는 영혼이 있을까. 고난을 이기고 참아내는 것도 능력이고 실력이라고 한다. 고난을 친구로, 질병을 길동무로 함께 지내지 못하고 걸핏하면 쉽게 비명을 지르고 엄살을 부렸던 내가 아니었나.
고통으로 말하면 예수님만한 분이 또 있을까. 인생노정 중간에 나는 길을 잃고 어느 숲속을 방황하며 살았다.
연약하고 실수 많은 인간이 성공과 행복에 이르는 길은 과연 무엇일가. 저 성공의 파노라마는 회개의 문 앞에 떠도는 겨울 바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필요를 위해서는 매우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늘 부족하지 않았던가.
병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길은 무척 길고 험했다. 그러나 매일같이 안산을 걷는 동안 새벽마다 출렁이던 통증은 작별의 인사도 없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 신비한 기적의 이유를 나는 찾아 나서고 싶다.
주여~돌아온 탕자를 두팔로 안아 주시고 뽕나무에 숨어 있던 삭개오를 찾아 부르신 것처럼, 저를 붙잡아 병들고 묻힌, 배고프고 짓밟힌 이들을 한 시도 잊지 말게 하소서. [오피니언타임스=곽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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