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쑈!사이어티]

“여보세요? 아 쌤, 오늘 수업 안하셔도 될 거 같아요. 저 가출했거든요.” (고2 남학생)
“엄마 언제 퇴근하냐구요? 저희집 이혼했어요. 저희 아빠 이혼만 세 번 했어요.” (고1 여학생)
“저희 아빠요? 저 15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때는 엄청 슬펐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고3 남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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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했던 청소년들이 직접 들려준 이야기다. 두 부모 아래서 ‘범생이’처럼 살아온 나에겐 매번 놀라운 내용이었고, 어찌 반응해야할지 당황스러웠다. 가출했다는 아이를 직접 찾아가 좋아한다는 돈까스를 사 먹이며 달래고, 곁에 없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아이와는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전문상담사나 들을법한 복잡한 이야기들, 하지만 내 직업은 청소년상담사가 아니다. 나는 평범한 과외선생이다. 대학 신입생 때부터,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지금까지 나는 대략 8년 정도 과외수업을 해왔다.

처음에는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에서 시작했다. 서울공화국의 비싼 학비와 방세, 생활비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다. 영어영문과라는 전공을 살려 영어를 가르쳤는데, 수능영어는 특성상 성적을 올리기 쉬웠다. 반복되는 문법은 암기시키고, 모르는 단어는 그때그때 수집하는 습관을 들여주면 어느정도 성과가 나왔다.

수업은 보통 ‘월 8회, 2시간’ 정도에 학생당 40~50만원을 받았다. 대게 ‘학생 자택 수업’ 옵션이 있어 왕복2시간이 필요했으나 시급으로 치면 1만5000원 정도로 벌이도 괜찮았다. 자취생활을 하며 사먹기 힘든 과일, 빵, 우유 등이 간식으로 제공되는 점도 매력적이다. 겉보기에 과외는 수업하고, 간식 먹고, 수업료 받는 무난한 파트타임 직업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일수록 과외수업이 버겁게 느껴졌다. 수업에 익숙해질수록 나를 받아준 한 가정의 풍경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학생과 대화를 거듭하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마치 새하얀 종이 위에 수채화를 그리듯, 그 학생의 일상과 가족의 내력 등 집안의 역사가 하나둘 윤곽을 갖춰갔다. 그리고 완성된 풍경화의 모습은 대개 우울했다.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과외학생의 집안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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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과외수업은 부모의 죄책감에서 비롯했다. 학생이 먼저 수업을 원한 적은 거의 없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여러가지 이유로 미안해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 탓에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고,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사랑을 듬뿍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했다. 과외는 그런 부모의 미안함을 달래주는 수단이었다. 부모들은 ‘과외쌤’에게 많은 역할을 기대했다. 부모들은 과외선생이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아이의 학습을 도와줄 ‘개인교사’이자, 함께 웃어줄 ‘형제·자매’이고, 성장기의 고민과 외로움을 자상하게 들어줄 ‘부모’이기를 바랐다.

많은 부모들이 50만원이라는 적잖은 수업료를 기꺼이 내어주는 이유는 어쩌면 이 많은 역할을 바라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과외쌤에게는 지식만큼이나 성숙한 인간성이 요구되곤 했다. 심리전문가도 보듬을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가진 학생을 만날 때도 있었다. 부족한 나의 역량으로는 해줄 것이 많지 않았다. 그저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옆에서 가만히 앉아 목소리를 들어줄 뿐이었다.

또한 과외수업은 학생의 죄책감을 먹고 자랐다. 부모 못지않게 자식들도 미안함에 짓눌려있었다. 아이들은 입시경쟁에서 높은 등급을 받지 못해서 미안했고, 하루종일 학교에서 주입식 수업에 시달린 나머지 집에서는 ‘열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부모에게 미안했다. 어른들조차 오후 6시가 넘으면 퇴근을 꿈꾸는데, 아이들은 잠자리에 눕는 그 순간까지 공부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도저히 혼자서는 책을 펼칠 인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과외선생은 부모 대신 옆에서 잔소리하고 떠들어줄 대리자로서 필요했다. 수업을 듣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볼 때면, 오죽 지쳤으면 하는 마음에 깨우기 망설여졌다. 좀 더 과외경력이 쌓이고 나서는 아이에게 진통제역할도 해줄 수 있었다. 연애나 게임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 수험생활의 고단함에 공감하고 아이를 응원해주었다.

수업을 마치고 떠나는 과외선생을 배웅하는 부모의 얼굴에는 아이에게 비싼 사교육을 제공했다는 만족감이 번진다. 아이의 미소에는 2시간동안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면책감이 묻어난다. 나 역시 생활비를 벌었다는 포만감을 얻고 떠났다. 과외수업 2시간은 그렇게 많은 이들의 죄책감을 덜어주었다. 과잉노동-학벌주의-주입식교육-서울공화국-대학등록금 등 한국사회 구조적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빚어낸 장면이다. 오늘도 수많은 부모와 자식, 과외선생들은 서로에게 죄책감을 사고팔 것이다. 그래서 과외는 ‘죄책감사업’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성훈]

 이성훈

20대의 끝자락 남들은 언론고시에 매달릴 때, 미디어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철없는 청년!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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