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의 글로 보다]

누나가 집 근처에 살아서 아내와 아이랑 자주 놀러가곤 한다. 그날도 같이 저녁을 먹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누나와 아내는 택시 탈 때 카드로 계산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나는 “아니 왜, 카드로 계산하면 얼마나 편한 데”라고 말했고 누나와 아내는 코웃음을 쳤다. 여자들이 카드를 내면 택시기사들이 대놓고 인상을 쓰고 싫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재수없다고 욕하는 기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택시를 탈 때는 당연히 현금으로 계산한다고 했다.

놀란 표정을 짓는 내게 누나와 아내는 남자로 태어난 걸 고맙게 생각하라고 했다. 나는 카드결제 택시가 나온 뒤부터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 기본요금 거리나 비교적 먼 거리를 갈 때에도 모두 카드로 결제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기사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지극히도 당연하고 편리한 일이 여성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였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포커스뉴스

나는 여성들이 택시에서 카드를 쉽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이 사회에서 여성들이기에 겪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여성이 아니고 택시에서 그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누나와 아내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남성들은 당연히 누리는 일들을 못 누리는 여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몰랐다는 사실이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작년 6월 부산에서 지하철 여성배려칸 제도가 3개월간의 시범 운영기간을 거쳐 9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여성 성범죄 예방과 임산부, 여성 동반 영유아를 위한 배려 차원에서 이용자가 많은 특정 시간대에 한해 여성 전용 칸을 운영한 것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자 많은 남성들이 반발했고 내 주변에서도 남자들의 볼멘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제도는 서울과 대구에서도 도입을 시도했다가 반대 여론에 의해 시행이 무산된 바 있다. 여성배려칸을 반대하는 남성들은 성범죄자만 처벌하면 되지, 왜 자신처럼 선량한 시민들까지 범죄자 취급하냐고 불만을 제기한다.

탈영이나 탈옥 같은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은 범죄자의 동선을 파악하여 그 지역을 지나는 모든 사람이나 차량을 검문한다. 일일이 신분증 검사를 하고 차량 안을 샅샅이 수색한다.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나는 탈영병이, 탈옥수가 아닌데 나를 잠재적 범죄자라 생각하고 검문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는다.

도로에서 음주단속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아닌데 경찰은 그런 나의 선량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음주 측정기를 매정하게 들이댄다. 그런 경찰에게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고 기분 나빠하는 볼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다만 실제로 술 마시고 운전한 사람들이 단속을 거부하며 반발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을 뿐이다.

경찰은 왜 그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을 검문하고 단속하는가? 그것은 누가 범죄자인지, 누가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지 일일이 검사하지 않으면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검문과 단속에 순순히 응하는가?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한시라도 빨리 흉악 범죄자가 잡혀야, 위험하게 음주 운전을 하는 차량이 없어야 우리가 사는 공동체가 안전하고 평화로워지기 때문이다.

©픽사베이

지하철 여성배려칸 제도가 시행되는 이유는 그만큼 남성들에 의한 성범죄 피해를 입는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성범죄뿐만 아니라 지하철 안에서 여성을 상대로 남성이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빈번히 발생한다.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다고 임신부나 젊은 여성에게 소리 지르고 행패부리는 남성들의 모습은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다. 월남전 참전 운운하며 소리 지르는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젊은 여성이 “앉으세요. 여기 앉으시려고 전쟁까지 치르셨는데”라고 말했다는 SNS 속 이야기는 절대 과장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작년 5월 강남역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많은 여성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수많은 피해 경험들을 SNS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 글들을 보면서 여성들은 지금까지 택시 안에서,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남자인 나는 느껴보지 못했던 불쾌감과 공포심을 느끼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 정도 일 줄은 솔직히 몰랐다. 나는 밤늦게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 한 번도 이 시간까지 뭐하고 지금 들어 가냐며 빈정거리는 택시기사를 만난 적도 없고,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자리 양보 안한다고 행패부리는 노인을 만난 적도 없다. 그 이유는 내가 유달리 험악하게 생기고 무섭게 보여서가 아니라 그저 비교적 젊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들이 택시에서 카드를 쉽게 꺼내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다. 이런 일들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아무 책임이 없는 걸까. 몰랐던 걸 알게 된 다음부터 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단지 여자, 장애인, 성소수자라서 당해야 하는 부당한 일에 나는 가해자가 아니니까, 잘 몰랐으니까 그냥 넘어간다면 한 사회를 살아가는 공동 구성원으로서의 기본 예의가 아닐 것이다.

지금 남자들이 할 일은 나는 몰랐다고,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발뺌할 것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행패부리는 노인에게 젊은 남성이 한마디 했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 내리고 다른 칸으로 이동하거나 황급히 다음 역에서 내리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나는 몰랐다며 그런 상황을 방관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동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흔히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고 한다. 그 절반이 살아가는 세상이 안전하고 평화롭지 않다면 나머지 절반의 세상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오피니언타임스=김동진]

 김동진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한때 배고픈 영화인이었고 지금은 아이들 독서수업하며 틈틈이 글을 쓴다.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