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시절 그노래] 옛 가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통해 살펴보니

‘노가바’를 아십니까?

얼핏 낯설게 느껴지는 이 말은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를 줄여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사곡(改詞曲)과 같은 뜻이지요. 이미 있던 노래에서 악곡은 원래대로 두고 가사만 바꾸어 부르는 현상인데요.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출현했습니다.

전래민요 아리랑이 전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것도 일종의 개사곡 버전입니다. 찬송가에도 개사곡 버전은 많습니다. 구한말 창가(唱歌)란 장르명칭으로 불렀던 노래들도 그 유래를 더듬어보면 유명한 외국곡조를 차용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문적 경험이 필요한 작곡보다는 개사가 한결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개사곡 만들기는 유행처럼 펼쳐졌고, 이와 더불어 각종 공개행사에서 개사곡은 일상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비판, 풍자, 조롱 등이 노가바의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노가바’는 하나의 확고한 문화현상으로 자리를 잡았고 독립적 용어로 정착이 되었지요.

노가바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기존가사의 패러디(parody) 방식인데 그 특성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정치적 풍자와 해학, 익살 따위로 펼쳐졌습니다. 기존 형태나 의미를 그대로 계승하는 방식도 있었고, 완전히 별개의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형태들도 있었습니다. 노가바는 이미 예전부터 민중들에게 즐겨 활용됐는데요. 그 대표적인 사례는 ‘황성옛터’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한 많은 대동강’ ‘비 나리는 호남선’ ‘청춘 브라보’ ‘동백아가씨’ 등등의 옛 가요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개사곡 가운데 가장 흔하게 즐겨 불렀던 ‘이별의 부산정거장’(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953) 노가바를 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곡가사는 잘 아실 테지만 그래도 옮겨보기로 하지요.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 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소식을 전해주소서
몸부림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요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문

1절의 내용은 부산정거장에서의 이별장면입니다. 떠나는 자는 타지에서 부산으로 피난살이 왔던 남성이고, 보내는 자는 부산사투리를 강하게 쓰는 지역출신의 여성입니다. 난리 통에서도 어쩌다 정분이 맺어져 두 사람은 외곽지 허름한 판잣집(하꼬방)에다 신접살림을 차리고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할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네요.

피난살이 3년째가 되던 1953년에 이루어진 환도(還都)가 바로 그 무서운 날벼락이자 사랑의 해체선고였습니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진 채 홀로 부산에 왔다가 맺어진 인연이지만 오랜 고민 끝에 그동안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발길을 어찌 막아설 수 있었으리오. 이별도 온갖 쓰라린 경우들이 허다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헤어지면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작별이 서러워 여인은 흐느껴 웁니다.

2절은 떠나는 남성이 드디어 열차에 올랐습니다. 열차의 종류는 서울행 십이열차, 당시 경부선 상행선은 짝수였고, 하행선은 홀수로 표시되었다고 합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열차에 올랐지만 남성은 마음속으로 한없이 웁니다. 사랑했던 여인은 차창 밖에서 눈물에 젖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네요. 기적소리를 울리며 하얀 김을 내뿜는 증기기관차가 서서히 출발하게 되면 부산역 플랫폼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통곡소리로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슬픔에 잠겨 듣는 기적소리조차 처연한 통곡으로 들렸습니다.

3절에서는 드디어 열차가 부산역을 서서히 떠나갑니다. 어쩌다 생각이 나면 꼭 몇 자의 안부라도 적힌 편지 한 장을 보내주시면 좋겠다고 여인은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저 애타는 얼굴로 보다가 열차가 부산역을 떠난 지 한참 뒤에야 남성은 산란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쉬면서 차창유리에다 여인의 이름을 적어봅니다. 심장을 도려내는 작별의 아픔은 두 사람에게 거의 비통한 절규이자 몸부림에 다를 바 없었습니다. 환도시기 부산역에서는 이런 장면들이 매일같이 펼쳐졌다고 하지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부산은 임시수도로 지정되었고, 북한군의 남침으로 살길을 찾아 내려온 피난민들이 무려 60만명도 넘게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원래 40만명이던 부산인구가 전쟁 이후 무려 100만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주택난, 식량난, 생필품난, 경제난 따위로 삶의 무수한 고난과 서러움, 애달픔, 애환은 사뭇 극에 다다랐으리라 여겨집니다. 이 과정에서 온갖 일들과 사연들이 기하급수로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가요형식이지만 당시의 이러한 사연과 현실을 사진처럼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는 소중한 기록문학 자료라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여전히 가슴에 한 가지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왜 부산역광장에 아직까지도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비가 세워지지 않고 있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대전역광장에는 그 유명한 ‘대전 블루스’ 노래비가 건립되어 대전시민의 위상을 한껏 빛내주고 있는데, 부산역에는 마땅히 갖추어져있어야 할 것이 없음으로 느껴지는 허탈감은 실로 크기만 합니다. 필자는 수년 전 부산지역에서 발간되는 모 일간지 칼럼을 통해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비를 부산역광장에 건립하자고 제안했었지만 이에 대한 반향은 전혀 없었습니다. 부산시청 관계자 및 여러 시민단체, 공공기관들에서는 지금이라도 필자의 이 제안에 귀 기울이고, 노래비건립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마련에 착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따금 부산역 플랫폼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노라면 1950년대 초반, 이곳에서 들리던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와 이별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합니다.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기막힌 이별 때문에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입니다. 전쟁보다 총칼보다 훨씬 사무치고 가혹한 것이 이별인 줄을 뒤늦게 소스라쳐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는 대중들의 뜨거운 사랑 속에서 불후(不朽)의 애창곡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도 노가바 형식에 의탁하여 줄곧 활용되어 왔습니다. 그 노가바 가운데 흥미로운 몇 사례를 시대별로 배열해서 여기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ⅰ)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내가 사준 금반지 내놔/ 너 같은 것 믿고 살다 내 몸이 말라 죽겠다/ 애당초 살림살이 하기 싫거든/ 애새끼 낳기 전에 떠날 일이지/ 몸부림치는 자식 뿌리치고 가는 ×아/ 어디가면 잘 사나보자(1960년대)

ⅱ) 서울 가는 × 빠질 놈아 외상술값 갚고 가거라/ 밑천 없는 이 장사에 식구가 열둘이란다/ 이것도 장사라고 한 번 해보니/ 밑천이 뚝 떨어져 못 해 먹겠네/ 영도다리 둘러메고 국제시장 팔러갈까/ 이별의 부산정거장(1960년대)

ⅲ) 서울 가는 완행버스에 돈도 없이 타는 고학생/ 차장하고 싸우다가 우연히 정이 들었네/ 학생이 내리며는 돈 달라 하고/ 순경이 내리며는 꼼짝 못하고/ 전국버스 차장들아 찬물 먹고 마음 돌려라/ 학생이 무슨 돈 있냐(1970년대)

ⅳ) 처녀총각 결혼 때문에 죽는 것은 돼지 한 마리/ 죽는 것도 서러운 데 이다지 푹푹 삶느냐/ 앞다리 뒷다리는 상에다 놓고 내장과 콩팥일랑 씹어 드시네/ 야이 시키 나쁜 시키야 이 돼지가 불쌍토 않냐/ 이별의 돼지우리야(1970년대)

ⅴ) 보슬비가 막걸리라면 한잔 먹고 뚱땅거려요/ 택시 한 대 잡아놓고 사랑을 속삭입니다/ 논 팔아서 돈 대 준께 ××만 하고/ 공부는 꼴찌에서 세 번째라네/ 야이 시키 나쁜 시키야 네 애비가 불쌍토 않냐/ 이별의 대폿잔이여(1970년대)

ⅵ)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멱살다짐 벌어졌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시는 말씀보세요/ 야 이놈아 아비한테 살살 때려라/ 네 애비가 동네방네 샌드백이냐/ 아버지 엄살 떨지 마 또 들어간다 카버 잡아라/ 이별의 개판 오 분 전(1980년대)

ⅶ) 보슬 레인(rain) 노(no) 노(no) 사운드(sound)/ 이별 새드(sad) 부산 스테이션(station)/ 아이(I)도 굿바이(goodbye) 유(you)도 굿바이(goodbye) 눈물의 기적 크라잉(crying)/ 한 매니(many) 피난 리브(live) 설움도 매니(many)/ 그래도 돈(don't) 포게트(forget) 판자 하우스(house)/ 경상도 로컬(local) 스피치(speech) 레이디(lady)가 새드(sad) 크라잉(crying)/ 세퍼레이트(separate) 부산 스테이션(station)(1980년대)

ⅷ)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경찰 득실 부산정거장/ 못 가세요 돌아가세요 무정한 방송이 운다/한 많은 노동자 삶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크레인이여/ 팔도의 사투리에 사람들이 외쳐대는데/ 희망의 소금꽃이여(1990년대)

ⅸ) 면접 가는 서울 지하철 서서 가는 젊은 취준생/ 시름 가득 내다보는 창밖이 깜깜하구나/ 쓰라린 탈락 터널 지나고 보니/ 그래도 놓지 못할 희망 때문에/ 전철도 목이 메어 소리 죽여 우는구나 (철철철)/ 눈물의 취업정거장(2000년대)

ⅹ) 우리 인생 길지 않아요 명품으로 살아봅시다/ 남은 인생 나의 인생 멋지게 살아봅시다/ 한 많다 신세타령 하지를 말고/ 멋지게 사는 방법 찾아봅시다/ 인생은 즐겁습니다 여기저기 하하 호호호/ 내 나이가 정말 어때서(2010년대)

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SP로 제작된 이별의부산정거장 음반 ©이동순

위의 사례에서 보듯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가바 주제들은 전쟁직후의 극심했던 경제난과 생활고, 부부갈등과 이별, 전통적 규범과 질서의 해체, 지역과 계층 간의 불평등, 청년세대의 취업난, 외국어 남용에 대한 조롱과 풍자, 노년세대의 자족적 삶과 의욕고취, 부패공직자에 대한 고발과 비판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짧은 노가바 한 소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 근현대사회사 및 민중생활사의 파란 많은 내력과 사연들이 리얼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노래 한 곡이 이렇게도 다양한 노가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격동기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하나의 필연적 산물이자 문화현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가바는 한국인만의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이 십분 발휘된 소중한 도구라 하겠습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가바는 위의 사례들 외에도 훨씬 풍부하게 수집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형태들을 광범하게 채록해서 면밀하게 분석해본 결과 노가바 어법은 거의 민중적 직설화법(直說話法)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다소 비속한 표현이나 일상적 어투가 느껴지긴 하지만 비유가 결코 복잡하거나 중층적(重層的)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대중들은 더욱 친근감과 일체감으로 빠져들 수 있었지요.

노가바의 기능성은 전환기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혹심하게 겪게 되는 고독감, 고립감, 단절감, 격리(隔離), 차단, 격절(隔絶)의 비통한 심정을 저만치 물러서게 합니다. 동시에 어떤 개인도 친족공동체 속에서의 밀착된 관계이자 통합적 존재라는 자기정체성을 뚜렷하게 인식시켜줍니다. 이러한 노가바 장르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풍자비판하고 있는 독립된 패러디작품으로 마땅히 인정돼야 합니다.

1950년대 후반 필자의 소년시절에 보았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문중에는 유난히 노가바를 잘 부르던 사람, 재치와 유머, 익살과 너스레에 능한 취객들이 반드시 한 두 사람쯤 있었습니다. 전쟁의 시련을 혹독하게 겪은 뒤 항상 우울하고 찡그린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당시 한국인들의 삶에서 그 취객들이 주도하던 노가바는 엄청난 위로와 격려, 긴장의 해소효과를 안겨주었습니다. 노가바에 일단 젖어드는 순간, 우울하고 수심에 가득하던 표정은 즉시 파안대소(破顔大笑)에다 가가대소(呵呵大笑)로 즐거운 하나가 되었지요. 지금은 거의 세상을 떠난 노가바 전문가들의 익살스런 노래가 새삼 그리워집니다.

우리 귀에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노래를 곡조는 그대로 유지시키며 가사만 슬쩍 바꾸어서 결혼식, 회갑잔치, 가족친지들과 벌이던 잔치뒤풀이나 각종 모꼬지에서 노가바 형식은 즐겨 유통되었습니다. 좌중의 폭소(爆笑)를 한껏 유발시키며 이를 바탕으로 공동체의식의 강화효과까지도 일시에 이루어낼 수 있었으니 그 얼마나 일거양득이었겠습니까.

노래가 본디 마음의 상처를 쓰다듬고 본연의 상태로 회복시켜주는 치유 기능을 지녔다 하거니와 노래 중에서도 민중들이 노가바 형식으로 즐기던 노래야말로 서민의 진정한 벗이었으며 매우 유용한 삶의 도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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