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따듯한 생각]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친구와 만나기 위해 두꺼운 코트를 꺼내 입었다. 입김을 길게 내쉬며 무심히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자 툭하고 무언가 손가락 끝에 걸렸다. 손때 묻은 작은 사진첩이었다. 사진첩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크기였다. 손바닥을 겨우 채우는 그것은 펼치면 8~9장 정도의 사진이 길게 늘어졌다.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이 거기 있었다.

지난 설날 할아버지가 준 물건이었다. 괜찮다는 말에도 할아버지는 끝까지 코트 주머니에 사진첩을 넣어줬다. 어떤 의미로 주신 걸까.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가는 내내 사진 속 어린 나를 바라봤다.

©김연수

친구와 이야기하다 문득 사진첩이 떠올랐다. 낯선 물건이 내게 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친구의 낯빛이 어두워지며 언제 사진첩을 받았는지 하나씩 캐묻기 시작했다. 그는 한숨을 몇 번 내뱉더니 이내 긴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몇 년 전 하늘나라로 떠난 친구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오래도록 아끼던 30년 묵은 인삼주를 가져가라고 말했다. 친구 아버지는 다음에 와서 가져가겠다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는 앞니가 빠지는 꿈을 꾸었다. 곧바로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고 그녀는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가 아이처럼 펑펑 우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자연사였다. 할아버지는 깊은 잠에 취해 고통없이 가셨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미리 죽음을 준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한다. 자식들 모두 장성해 삶에 큰 미련은 없으셨을 거라 위로했다.

친구는 오랜 시간 몸에 지니면서까지 간직해온 사진첩을 주었다면 심리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솔직히 사진첩을 건네받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사진에 대한 기억도 흐릿했고 어린 내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났다. 하지만 왠지 그 사진의 주인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사진이란 사랑하고 아끼는 이의 것을 간직해야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진첩을 받지 않으려 한사코 거절했지만 할아버지의 뜻이 꽤 강경했다.

그런데 이게 만일 할아버지가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어서 소중한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거라면? 친구의 말을 들을수록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답답했다. 나는 아직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 자살 예방 안내문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청소년 자살률이 높아져 나눠줬다는데 사실 불필요한 안내문이라 여겨 대충 읽고 넘겼다. 잿빛 갱지에 적힌 문구들 중 내가 기억하는 것은 딱 한 문장이다.
“평소 아끼던 물건을 주위 사람들에게 망설이지 않고 내어준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맞아 떨어질까 싶었다. 할아버지가 방황하는 청소년은 아니지만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면 아끼던 물건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저 문장이 떠오르자마자 나는 부모님께 내 걱정거리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사진첩을 주실 때 굉장히 의아했다며 할아버지 댁에 식사하러 자주 찾아뵙자고 말했다.

©픽사베이

나는 요즘 통학 버스를 기다리며 할아버지와 짧은 통화를 한다. 몇 해 전만 해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며 할아버지와 자주 통화하곤 했다. 한동안 까먹었다가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지금도 할아버지는 과묵한 편이다. 그저 내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면 할아버지는 이따금 맞장구를 치거나 웃어보인다. 그래도 5분여의 통화로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웃을 수 있어 감사하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 졸업식에 오시지 못한 할아버지를 위해 동생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찾아뵙기도 했다. 한창 사춘기라서 꽤 예민한 편인데 주말에도 교복을 입어준 동생에게 고마웠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을 보며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아니면 과연 어떤 일에 민감해야 할까. 사람들은 걱정이 너무 많아도 탈이라며 그런 생각 중 90%는 불필요한 걱정이라고 한다. 그렇다 해도 난 아랑곳 않고 걱정을 계속할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중 어느 게 더 클까. 나는 부모의 자식사랑이 더 크다고 장담한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밤새워 간호하며 대신 아프고 싶다고 말한다. 자식도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 똑같이 걱정하지만 마음의 무게는 다르다.

어머니의 전화번호부만 봐도 그렇다. 내 사람(아버지), 사랑하는 우리 딸(나), 보고 싶은 우리 아들(동생), 아버지 새 폰(할아버지) 이렇게 저장되어 있다. 슬프게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보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민망하게 웃어보였다. 가정을 꾸리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 아버지, 어머니라고 무미건조하게 저장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부디 삶에 치여,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삶 속에는 영원한 것도, 슬프지 않은 이별도 없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영원하지 않은 삶, 이별해야한다면 모두 덜 아픈 이별을 준비하며 살길 바란다. [오피니언타임스=김연수]

 김연수

  제 그림자의 키가 작았던 날들을 기억하려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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