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완의 애, 쎄이!]

니플러는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에 나오는 신비한 동물이다. 주인공 뉴트와 함께 다니는 이 귀여운 골칫덩이는 뉴트가 뉴욕에 온 순간부터 사고를 쳐서 주인공을 곤란하게 만든다. 니플러는 반짝이는 것이 있으면 모두 챙기는 습성이 있다. 니플러에게는 캥거루처럼 주머니가 있는데 무한한 크기여서 은행 금고에 있는 금을 다 챙겨 넣고도 보석상에서 금은보화까지 모두 쓸어 담을 수 있다. 니플러는 귀엽기도 하고 주인공 뉴트를 놀리는 데도 일가견이 있어서 나오는 모든 장면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마법사 일행과 함께 다닌 노마지 제이콥이 비를 맞으며 기억을 잃는 장면이다. (노마지: ‘NO MAGIC’,마법사가 아닌 그냥 평범한 인간을 뜻함)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 스틸컷

사건이 모두 종결되고, 뉴욕을 휩쓴 마법 때문에 마법사들의 정체가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주인공은 뉴욕에 기억을 잃게 하는 비를 내린다. 노마지들은 비를 맞으면서 지난 밤 자신들이 보았던 모든 마법세계를 잊게 된다. 사건 중심에 서있던 제이콥도 노마지이기 때문에 예외는 없다. 바깥으로 나가서 곧 비를 맞아야 하는 제이콥과 마법사 뉴트 일행은 쉬이 헤어지지 못한다. 모든 것을 잊어야 하는 상황 앞에서 제이콥이 주저하자 뉴트는 잠에서 깬 듯이, 꿈을 꾼 듯 기억을 잃게 된다고 다독인다. 그리고 정말 비를 맞은 제이콥은 긴 잠에서 깨어난 듯 얼굴에 흐른 빗물을 닦아내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그 장면 속에서 ‘지금’을 살아나갈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동화적인 발상이지만, 그 장면을 보고나서 생각했다. ‘아, 어쩌면 나도 마법사들과 이 세계를 구하고 정말 행복한 순간을 보냈을 수 있어. 하지만 내가 노마지이기 때문에 제이콥처럼 기억을 잃게 된 거지!’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에 무언가 즐거워졌다. 나의 잃어버린 기억 속 마법세계에선 지금처럼 아주 작은 무력한 현대인1이 아니라 반짝반짝 빛나는 주인공으로 존재할 테니까.

나는 이 감동을 나누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그거 약간 위험한 발상인 거 알지?’라고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힘든 현실을 살아가다보면 마주하는 것은 절망뿐이기에 그냥 외면하고 꿈과 희망이 가득한 가상 세계로 도망치려는 유아적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다. 마법의 세계에 심취해서 현실을 잊으려 한 것 같아서 순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했다. 나의 이 생각이 단순한 도피일지, 아닐지. 그리고 나의 마법세계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향한 내 나름의 기도문이고 응원가라는 답을 찾게 됐다.

©픽사베이

작년 연말, 신년을 맞이하는 기쁨도 없이 참 많은 친구들이 울었다. 내년에도 어차피 똑같을 거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내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우린 내년에도 계속 힘들 뿐이라고 했다. 나도 그들과 같이 울었다.

우린 비슷한 고민을 공유했다. 열과 성을 다해서 젊은 날도 버리고 계절이 오는 것도 잊으며 공부했는데 공무원이 될 수도, 의사나 선생님이 될 수도 없었다. 매일매일 면접 예상 질문을 뽑고 연습하고, 1시간 30분을 걸려 면접장에 가서 고작 10여분 면접을 보고 나와도 돌아오는 연락은 없었다. 한 친구는 점심을 먹다가 50대의 상사에게 아무렇지 않게 ‘요새 젊은 사람들은’으로 시작하는 훈계를 들었다. 월급 받고 쇼핑하고 이것저것 가득 사도 속이 텅텅 비어서 뭐하나 채워지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꾹꾹 참던 이야기를 풀어놓고 술과 분위기에 취해서 억울함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응어리가 남았다. 나, 힘들다고. 매일을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내일도 열심히 살아야 해서 힘이 들고, 언제부턴가 쉬는 방법을 잊은 것 같다고, 몸은 가만히 있는데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져서 눈만 데룩데룩 굴리다가 작게 몸을 웅크린다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대단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에게 합격증을 전해주고, 저 친구에게 일자리를 주고, 친구한테 욕을 한 상사와 일을 떠넘기는 동료직원을 때려주고, 멋있는 어른이 되지 못해서 우울한 친구가 자신감을 갖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현실이라는 것은 주사위를 굴려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부루마블이 아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니플러를 불렀다.

©픽사베이

언젠가부터 나는 ‘힘내!’ ‘화이팅!’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주저한다. 그 말의 허망함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쥐어짤 기력이 없고, 힘을 내도 파이팅할 대상이 결국엔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매일 마주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우는 친구에게 쉽게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도망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원인을 찾고 결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어도 나오는 건 공허한 숨소리뿐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생각하기를 그만 뒀다. 어떨 때는 생각하지 않는 게 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눈물을 닦는 친구의 얼굴 위로 빗물을 닦아내는 제이콥의 얼굴을 겹쳐보았다.

아주 가끔 술에 취한 듯이 “우리가 주인공인 세계를 생각해봐. 사실 우리는 존나 짱짱 쎈 히어로인데 기억을 잃고 사는 걸 수도 있어. 사실 우린 진짜 짱짱 쎄고 멋지다고. 그러면 조금 괜찮아지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러면 대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다. 그런데 사실 나는 정말 우리가 짱짱 쎈 세계를 생각한다. 네가 주인공인 그곳, 네가 행복한 그곳을 매일 생각한다.

모두들 이성과 지성과 논리를 들고 세상의 문제를 파고들려 할 때 나는 아주 조그마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이 허무맹랑한 기도문을 읽는다. 현재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몇 퍼센트인지, 내년에 예측되는 경제성장률은 몇 퍼센트인지, 취업은 어떻게 하고 결혼자금은 어떻게 마련하고, 부모님의 노후자금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통계적이고 수치적인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이 응원가를 읽는다. 나는 너에게 돈을 줄 수도 없고 너의 모든 걱정 근심을 없애줄 수는 없지만 천진난만하고 허무맹랑한 이 기도는 줄 수 있다.

너는 기억을 잃는 비를 맞아서 잊고 있겠지만 사실 대단한 주인공이고, 언젠가 니플러가 네가 정말 바라고 바라는 반짝이는 무언가를 가져다 줄 거라고. 우린 정말 잘 뛰고 있어서 이런 환상 하나 갖고 있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나는 나를, 우리를 향해 기도한다. [오피니언타임스=우디]

 우디

 여행, 영화, 글을 좋아하는 쌀벌레 글쟁이.
 글을 공부하고, 일상을 공부합니다.
 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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