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쑈!사이어티]

모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된 대선주자검증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질문자: 적폐대상은 꼭 제거하겠다고 하시던데요? 이재명 지원자의 발언을 들어보면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인식이 엿보입니다.
이재명: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청산하고자하는 상대는 우리사회의 불법적 요소들입니다.
질문자: 선악의 구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너무 단순하게 나누는 것 아닌가요?
이재명: 선악이 아닙니다. 저는 불법과 합법을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은 구속되는 게 맞습니다. 힘과 권력을 가졌다고 예외 취급을 하면, 억울하거든요.너희도 힘이 세지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대선주자국민면접’ 방송 캡처 ©SBS

초유의 대통령 파면을 앞두고 대권잠룡들이 ‘적폐청산’을 외치던 때였다. 그런데 정작 ‘적폐청산’의 뜻을 제대로 정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적폐’는 무엇이고 ‘청산’은 무엇인가? 오랜 세월 쌓여온 부정부패를 말끔히 청소한다는 이 사자성어는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급기야 상당수 시민들은 이 어려운 한자어에서 ‘복수, 숙청’ 등 부정적 어감을 떠올렸다. 적폐청산을 많이 언급하는 야권주자일수록 비호감도가 비례해서 커진다는 여론조사도 있었다. (이재명, 심상정>문재인>안희정) ‘적폐청산’은 그저 특정 정치인의 ‘과격함’, ‘싸가지없음’을 방증하는 단어가 됐다. 오히려 그 대척점인 ‘대연정’을 언급한 후보가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위 장면은 주목할 만했다. 적폐청산을 가장 많이 말하고, 그래서 ‘싸가지없다’고 오해받던 이재명 시장에게서 변화가 감지됐다. ‘적폐청산’의 의미가 너무 모호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이재명은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삼성 부회장도 전직 대통령도 죄를 저질렀다면 처벌받아야 한다. 명쾌하다.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다. 진작 이렇게 쉬운 구호를 제시했다면 그는 비호감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대선주자들의 언어는 다시 ‘적폐청산’으로 돌아갔고 언론들도 열심히 ‘적폐청산’을 받아 적었다. 시민들은 ‘적폐청산’을 달리 해석한 두 패로 갈려 서로를 매도했다.

‘적폐청산’에는 무려 네 가지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① 박근혜-최순실 사태의 정경유착, 권력남용 등 범죄행위를 원칙대로 처벌한다. (법치)
② 친일-독재 등 권력형 범죄에 침묵한 과거를 반성한다. (역사)
③ ①과 ②를 실행하고 그 권력에 기생해온 언론과 정치인들을 보이콧(불매운동)한다. (윤리)
④ ①~③을 실행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을 지지한 세력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사회)

1번은 ‘법치확립’ 정도로 바꿔쓸 수 있다. 권력자라고해서 솜방망이 처벌하는 관행을 없애자는 것이다. 기준과 대상이 명확해서 대선공약으로 적합하다. 2, 3번은 시민사회의 몫이다. 언론불매 혹은 낙선운동 등 자정캠페인이 진행되면서 ‘부역언론’ 혹은 ‘부역정치인’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하는 과정에 있다. 문제는 4번이다. 4번에는 ‘적폐세력’이라는 추상명사가 등장한다. 해석여하에 따라서 ‘적폐세력’은 특정 후보-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2만원이 아쉬워서 집회에 동원된 노인, 가짜뉴스에 속아서 사태파악을 못하는 시민이 될 수도 있다. 이만큼 모호하고 실속없는 구호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상대를 정략적으로 공격할 뿐인 적폐청산이라는 용어는 그만 언급하자”고 제안했다.

정치의 언어는 간결해야 한다. 특히나 말 한마디가 곧장 기사 제목이 되는 대선토론 기간에는 더 더욱 선명한 언어가 오가야 한다. 지지세력 간 경계선이 확정되고 중간세력이 거의 남지 않은 현 시점에서는 감정과 해석에 휘둘리지 않고, 상대방 진영의 지지자들도 납득시킬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후보가 확장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적폐청산’ 수준에서 구설수에 오르는 문재인 후보의 행보는 유감이다. 그는 당내경선에서 ‘대연정’의 안희정과 ‘적폐청산’의 이재명을 꺾었지만 정작 그들로부터 별로 배운 바는 없는 듯하다.

이제 ‘적폐청산’을 지우자. 대선주자의 약속은 더욱 선명해야 한다. 그 자리를 대신할 단어는 많다. ‘공정한 법치주의’, ‘공직기강 확립’, ‘원칙이 통하는 세상’, 무엇이든 좋다. 유권자에게 믿음과 확신을 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성훈]

 이성훈

20대의 끝자락 남들은 언론고시에 매달릴 때, 미디어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철없는 청년!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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