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고려시대 창건된 여수 흥국사는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할 것”이라는 국가 안녕의 염원을 담은 호국사찰이다. 창건 직후 젊은 학승이 백일기도의 회향축원문에 흥국기원(興國祈願)은 빠뜨리고 성불축원(成佛祝願)만 넣어 쫓겨났다는 일화도 전한다. 불교국가 고려가 왜구가 들끓던 남해안 지역에 지은 절이 꼭 종교적 목적만 가진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절이 조선시대에 오히려 호국사찰로 진가를 발휘한 것은 아이러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조선은 불교를 버리고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왕조 초기의 강력한 척불 정책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크게 후퇴했다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불교가 국난극복에 동참해 스스로 위상을 상당 부분 회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 흥국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남 여수 흥국사의 공북루 현판. 이순신 장군의 필적으로 알려진다. ©서동철

오늘날 흥국사는 불교 문화유산의 보고다. 대웅전과 대웅전 후불탱화, 노사나괘불탱, 흔히 무지개다리로 부르는 홍교 등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만 9점에 이른다. 대웅전을 비롯해 팔상전과 불조전, 원통전, 응진전, 무사전, 봉황루, 천왕문, 영성문 등 25채의 당우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심검당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불타버린 흥국사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전각은 양난(兩亂) 직후 집중적으로 지어졌다. 국가의 재정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흥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의승수군유물전시관이었다. 다른 사찰의 유물 전시 공간이 대부분 ‘성보박물관’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수군(義僧水軍)의 본거지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의승수군의 존재는 영화 ‘명량’에 비중있게 등장했다. 1972년 신문기사를 보면 당시 의승수군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여수 흥국사 봉황루에서 충무공 수결(手決) 발견’이라는 기사다. 제목은 이렇게 되어 있지만, 수결이 들어간 완문(完文)이 발견됐다는 내용이다. 수결은 일종의 사인이고, 완문은 지방 행정 조직의 우두머리가 보낸 일종의 공문이다. 완문은 ‘흥국사 승병은 좌수영에 속하며, 군졸로 대우해 세금을 면제하며 밥을 짓는 공양주와 불을 때는 화공, 시설을 세우는 목수에게도 같은 대우를 하라’는 지시를 담고 있다. 완문 말미에 ‘일심’(一心)이라고 쓴 수결이 보인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1월 이런 조치를 취한 이 충무공은 3월에는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자기 몸 편안히 할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정의와 기개를 발휘하여 각각 300명씩 거느리고 수치를 씻으려 하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2년째 해상에 진을 치고서 간신히 양식을 이어대는 고생스러운 정황은 관군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아직도 수고로움을 마다않고 더욱 더 부지런할 따름입니다. 일찍이 적을 토벌할 적에는 공이 현저했고, 나라를 위한 마음은 처음부터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상합니다.’

여수 흥국사 천왕문. 다른 대부분의 천왕문처럼 임진왜란 이후 지어졌다. ©서동철

‘충무공 전서’에 전하는 장계에서 이순신 장군은 공을 세운 의승수군에게 상을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렇게 하면 앞으로도 의병이 되어 왜적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는 완문말고도 충무공의 친필로 여겨지는 유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공북루(拱北樓) 현판이다. 의승수군의 지역본부 역할을 했던 흥국사에는 일종의 방어성이 둘러쳐져 있었던 듯 하다. 그 방어성의 성문 중 하나가 공북루였다.

의승수군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활동했던 듯하다. ‘충무공전서’에는 1592년 8~9월에 벌써 400명 남짓 병력이 모였고, 순천 송광사 삼혜와 여수 흥국사 의능, 광양 옥룡사 성휘, 구례 화엄사 신해, 남원 실상사 지원을 정규 수군의 지휘관으로 기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의승장 의능은 전라좌수영에서 적을 지키게 하면서, 적군의 정도를 살펴 육군이 세면 육지에 가고 수군이 세면 바다에 가기로 약속했다.’고 했으니 흥국사 의승수군은 기동타격대 역할을 했다. 의승수군 사례를 살폈지만, 당연히 육지의 의승군 역할이 더욱 막중했다.

서산대사 휴정과 그 제자인 사명대사 유정의 활약은 어린시절 만화책에도 등장해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합천 해인사의 산내 암자인 홍제암에는 사명대사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와 그의 생애를 기록한 석장비가 있다. 그런데 교산 허균이 지은 비문에는 ‘대사가 중생으로 하여금 혼돈의 세계인 차안(此岸)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건네주는 일을 등한히 하고, 구구하게 나라를 위하는 일에만 급급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는 대목이 있다. 불교계 일각에서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왕조에 협력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충북 보은 법주사 천왕문의 동방지국천의 발밑에 깔린 악귀. 왼쪽이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오른쪽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전설이 있다. ©서동철

흥국사가 그렇듯 양란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불사(佛事)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파괴된 사찰의 모습을 이전 상태로 회복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전보다 키우는 대대적인 불사도 적지 않았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호국활동을 펼치며 입지를 다시 넓힐 수 있는 명분을 쌓은 불교다. 게다가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백성의 마음을 보듬을 수단은 불교 말고는 없었다. 목탁대신 창칼을 잡는 정치적 결단으로 불교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양난은 사찰의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천왕문(天王門)의 유행도 그렇다. 절의 들머리에 세워지는 일주문을 지나 본격적인 사찰 영역에 들어서 대개 처음 마주치는 전각이 천왕문이다. 내부에 무섭게 생긴 사천왕(四天王)이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을 조각해 놓은 문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사천왕은 고대 인도의 토속신앙에서 유래했지만, 불교에 편입되면서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천왕상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경주 사천왕사터 소조 사천왕이나 감은사터 석탑의 사리장엄같은 소규모 조각상이나 불탑에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도 석탑·석등의 조각에 보인다. 그런데 조선후기들이 갑자기 천왕문의 형태로 스케일이 커진 것이다.

법주사 천왕문의 사모관대 차림 인물은 양란을 불러일으킨 무능한 조정 관료를 상징하고 있다고 봐도 좋겠다. ©서동철

천왕문 건립을 주도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승군대장이었던 부휴당 선수와 그의 제자 벽암 각성이다. 조선 후기 천왕문은 17곳에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전 것은 1515년 세워진 장흥 보림사 것이 유일하다. 보은 법주사는 1624년, 순천 송광사는 1628년, 구례 화엄사는 1632년, 완주 송광사는 1649년 조성한다. 이후 흥국사를 비롯 고흥 능가사, 홍천 수타사, 고창 선운사, 청도 적천사, 남해 용문사, 하동 쌍계사, 양산 통도사, 안성 칠장사, 서울 봉은사, 영광 불갑사에 잇따라 세워졌다.

천왕문은 종교 건축의 좁은 의미를 뛰어넘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교훈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일종의 역사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다가오는 부처님오신날 찾아간 절에서 우연히 사천왕문을 발견한다면, 종교적 의미를 넘어선 그 정치적 의미를 한번쯤 새겨봐도 좋을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전곡선사박물관 운영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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