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다음달 9일에 치러질 제19대 대선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 탄핵의 결과 실시하게 됐다는 점, 15명이나 되는 사상 최다 후보 등록을 기록했다는 점, 선거운동 기간이 전례 없이 짧다는 점 등이다.

이번 대선 기간을 지켜보면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특징이 있다. 바로 TV토론에서 당연히 올라가야 할 당연한 주제, 즉 한반도 통일에 관한 문제가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대선에선 외교·안보와 함께 통일 문제는 언제나 비중 있게 다뤄져 왔었다.

그에 비하면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17일 이전 TV 토론에서는 통일문제 자체가 아예 목록에 없었다. 23일 중앙선관위 주관 공중파 토론에서는 ‘대북정책’이라는 주제가 들어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 논의는 이뤄지지도 않았고, 후보들 간 말꼬리를 잡거나 감정싸움만 하다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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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날의 주제는 ▲외교·안보·대북정책 ▲권력기관·정치개혁 문제 등이었지만 대북정책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사람들에게서 한반도 통일에 관한 구상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 또한 사상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장 큰 책임은 토론을 진행하는 방송사 측이 져야 할 것이다. 어떤 주제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방송사측이 결정할 문제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이전(4.17)까지만 해도 TV토론에서 통일문제가 빠졌을 때는 주제가 없었으니 그랬다고 치자.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대북정책’이란 이름으로 의제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론조차 되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후보들이 사상 최초로 서서(스탠딩) 진행하는 토론이라며 요란을 떨었지만 막상 그 장점은 온데간데없고 시종일관 상호 비방과 말싸움, 인신공격과 같은 네가티브만 여실히 드러낸 봉숭아 학당이 되고 말았다.

이날 진행을 맡은 KBS측 사회자는 2시간 내내 5명의 후보자들을 적절히 통제하거나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사회자는 토론자들이 주제에 벗어나면 1차 경고를 하고, 다시 시도하면 더 강한 제재를 함으로써 토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날의 사회자는 적극적인 중재자나 경기장의 심판 보다는 소극적인 방관자 역할에 더 치중한 듯 보였다.

미국식 스탠딩 토론을 최초로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후보들을 두 시간 동안 서 있게 한 것만 닮았을 뿐 후보들끼리 열띤 정책토론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후보들에게 “앞으로 몇 분 더 쓸 수 있다”며 그저 시간만 알려주는(Timer)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은 크게 아쉬웠다.

물론 부실한 TV토론의 책임을 사회자에게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23일 중앙선관위 첫 번째 토론회 날 바른정당의 유승민 휴보가 문재인 후보를 향해 “북한이 우리의 주적(主敵)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서부터 분위기는 초반부터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역대 선거 때마다 봐 왔던 익숙한 모습이지만 상대 후보의 안보관이니 국가관이니 하는 것들을 이분법적인 선악의 개념으로 꿰맞추려는 행위야말로 매카시즘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생각은 옳고 정당하며 상대방의 생각은 잘못되고 문제가 있다는 식의 이분법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런 선동적 발언으로 상대방을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사람은 역시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였다. 그는 처음부터 작심한 듯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에게 공세를 집중했다. 먼저 자신의 정견을 밝히고 상대방의 질문에 답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듯 시작부터 색깔론으로 전면 공세를 폈다. 이러면 정책토론은 아예 불가능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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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후보는 주로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대의 정책 등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DJ의 햇볕정책과 남북정상회담 무렵 대북 송금문제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자신에게 쏟아진 돼지흥분제 논란에 대해서는 ‘40년도 더 지난 대학시절의 일’이라며 애써 본질을 축소하려 했다. 안철수 후보를 향해서는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처음엔 반대했다가 요즘엔 왜 찬성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배경이 궁금한 게 아니라 ‘오락가락’ 했다는 쪽으로 몰고 가려는 숨은 의도가 보였다.

바른 정당의 유승민 후보도 이날은 ‘토론의 달인’ 답지 않게 주적 문제로 문재인 후보를 궁지에 몰아넣는 등 홍 후보와 보조를 같이 하는 것 같았다. 이를 통해 문 후보의 대북관과 안보관에는 문제가 많아 믿을 수가 없고, 자신은 그런 면에서 완벽하다는 점을 시청자들에게 차별화 시키려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권위주의 시대를 살아 온 지금의 유권자들은 그런 이분법적인 흑백논리에 쉽게 현혹되지 않는다. 대선 후보들이 자신의 비전은 밝히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서 꼬투리나 잡고, 철 지난 이념논쟁을 끌어들여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검증하려 드는 자세는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사실을 유권자들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아직도 국민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귀중한 TV토론에 한반도의 미래 비전, 즉 통일담론을 얘기하지 못한다면 어찌 대통령 자격이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대선 후보가 남북한 통일에 관한 비전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선 후보들은 최우선으로 통일을 위한 나름의 비전과 추진전략을 국민 앞에 과감하게 제시하고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한반도 위기설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이지만 당사자인 우리만은 통일에 관한 전략과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핵과 미사일로 끊임없이 남쪽을 위협하는 북한을 우리의 주적으로 삼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장차 통일문제를 협의해 나가야 할 파트너로도 상정해야 하는 모순구조를 안고 있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청년 정당 ‘우리미래’가 주최한 ‘통일 대통령의 조건’이라는 정책토론회에서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은 “통일담론 없는 대선후보는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홍 전 회장은 그러면서 “이번 대선에 나선 후보들은 자신만의 통일담론을 내놓고 (보수·진보 후보별로) 역할분담을 해서 정교한 통일정책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선후보 TV 토론이 한창인 요즘 그의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홍 회장은 보수·진보가 공동으로 추진해야 할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3가지를 들었다. ▲어떤 위기 상황이라도 남북대화의 테이블은 계속 유지할 것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할 것 ▲이산가족 상봉은 지속적으로 실시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어 그는 “요즘 같은 선거 국면에서 모든 주자들이 통일을 얘기하는 것은 위험하고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길은 통일”이라며 “젊은이들이 먼저 통일담론을 일으키는 것이 통일의 첫 걸음”이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토론에서는 제발 엊그제(23일)와 같이 물어뜯고 할퀴는 저질 말싸움을 탈피하고, 더 나은 한반도 미래 청사진을 내놓고 생산적인 정책토론과 통일담론을 펼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유권자들은 그런 구시대적이고 퇴행적인 TV토론은 더 이상 시청하지 않겠다는 시청거부 운동에 돌입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김준범

 (주)대한공론 상임 고문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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