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소중한 사람]

아버지는 울면서 염을 했다. 20년 넘도록 암만 주물러도 곧게 펴질 줄을 모르고 영영 굳어버린 할머니의 왼쪽 무릎을 주무르고 또 주물렀다. 굵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할머니는 결국 세상에 처음 나올 때처럼 곧고 가지런한 다리로는 떠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종내 서러워하며 떼쓰는 아이마냥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장례지도사 자격증이 그의 본업이 아닌 부업에 추가 된 날을 기점으로 늙어가는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생업과 할머니를 돌보는 일 외에 성당 연령회(성당 내 돌아가신 분의 장례절차를 돕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종의 봉사단체)에 열심히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호였다. 예전에 내가 보았던 태산 같던 등짝은 점점 작아져 우리집 뒷동산만한 크기가 되었지만 영원한 우리 팀의 주장으로써, 아버지는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 경기의 후반전이 끝나 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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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경기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저 전, 후반이 반복될 것이다. 다만 그저 들고 나는 것이 선수 각각의 운명일지라도, 함께 했던 동료들에게 있어 경기가 끝나고 그 선수가 은퇴한다는 것은 의미가 컸다. 경기장 밖은 누구도 돌아온 적은 없는 세계였고, 영원한 단절을 의미했다.

현재 선수는 8명. 어린선수 두 명에게 치킨을 사주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선수 한명의 은퇴(할아버지)와 생각만 해도 입이 헤하고 벌어지게 되는 새로운 선수의 영입(첫 조카), 그리고 새벽에도 달려 나와 반겨주던 꼬리달린 선수의 은퇴(15살 노견)와 아직도 어른남자가 무서운 새 선수(2살 견)의 영입을 통해 남은 선수 8명.(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 올케, 조카, 강아지)

8명의 선수는 곧 7명이 될 것이었다. 후반전 끝나는 휘슬이 울린 뒤에는 8명 중 1번 선수가 영영 은퇴하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지도사 자격증은 그 휘슬인 셈이었다. 아버지는 최후의 휘슬을 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호가 울리고 장례지도사가 은퇴한 선수의 염을 하면, 이제 선수는 더 이상 이승의 필드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영혼이 떠난 육신은 더 이상 현실의 동료가 될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지금 다른 팀의 은퇴선수를 위해 열심히 휘슬을 불어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경기가 연장전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져보았다. 하지만 그의 염원도, 선행도 할머니의 영원한 은퇴를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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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7년 넘는 시간을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자신으로 살았다. 치매는 그녀가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볼 시간도, 사랑했던 가족들과 나눌 마지막 인사의 기회마저도 빼앗아 갔다.
치매가 가장 잔인한 질병이라고 불리는 데는 그 이유가 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파괴된다. 환자 본인과 가족 모두.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뇌에 손상을 입거나 뇌가 파괴된 환자가 학습, 언어 등의 인지능력과 정신기능을 모두 상실해 나가다가 종내에는 신체의 기능마저 상실해 죽음에 이르는 것, 치매(dementia)는 라틴어(demens정신이 나가다, 미치다)에서 유래됐다. 그리고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로 누구도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로를 이어가던 육체가 폐렴 등의 노화성질환등으로 소진될 때까지 5년에서 10년간의 투병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모든 정신의 기능을 잃어버린 환자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게 된다. 자신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지능력장애와 평소 가족이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성격변화와 이상행동에 대해 병적인 증상이라고 의사가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가족 입장에서는 정서적인 면으로 해석하고 상처받기 마련이다. 수십년간 살 맞대고 살아온 배우자나 부모, 형제, 자매가 자신들을 잊어가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봐야하며,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돌발행동에 피말리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환자가 임종을 맞는 순간에 조차 의미 있는 단어 한마디 기대할 수 없다. 정신이 백지로 남은 환자와 그 환자에게서 상처 입은 보호자의 정신적인 고통은 상상의 범위를 뛰어 넘는다.

더불어 긴 투병기간이 주는 경제적인 어려움 또한 크다. 물론 우리나라의 치매노인에 대한 정책은 잘되어 있는 편에 속한다. 그리고 장기요양보호제도도 훌륭한 편이다. 하지만 정부가 많은 부분을 지원해 준다고 하더라도 가정요양, 주간보호, 요양원, 요양병원 그 무엇을 택하든 아무리 최하로 잡아보아도 월 50만원부터 시작하는 개인적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감당하는 보호자가 단 한사람일 때, 간병으로 인한 사회로 부터의 고립과 환자로부터 받아온 정신적인 상처, 경제적 부담감과 내가 아니면 환자도 살길이 없다는 절망감은 가정 내 치매환자 살해사건을 끊이지 않고 일어나게 하는 공통된 요인으로 지목이 될 만큼 심각한 조합이 된다. 1997년 4월의 70대 노인이 치매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은 12층에서 자살한 사건은 올해 초에 일어난 80대 노인이 치매 아내를 살해한 사건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다른 사건들도 아주 비슷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몇 년 간이나 치매 환자를 간병해 왔을 만큼 가족 사이에, 남편과 아내, 부모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정이 두터웠다.
하지만 ‘치매’라는 질병은 보호자를 살인자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인간’을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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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섬망(delirium:환각을 보고 행동(헛소리, 헛손질)으로 반응하는 것)으로 심하게 고생했다. 특히 새벽마다 가족들을 깨워 아주 오래도록 이야기하고 행동했다. 자 이제 됐지, 하고 할머니의 방문을 닫아 주어도 다시 나왔다. 다시 닫아 주어도 다시 이야기 하자고 나왔다. 한번은 할머니가 중공군의 탱크를 보고 놀라 우리 모두 길 옆 도랑에 숨어있었던 적도 있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할머니는 중공군에게 들킬까봐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우리의 머리통을 아주 으스러지도록 누르고 있었다.

중공군 탱크 사건은 참 아이러니다. 할머니가 우리의 잠을 강제로 깨우고, 새벽에 나가려 하고, 밥을 손으로 먹고, 물바다를 만들고, 옷을 다 찢어놓고, 아기처럼 기저귀를 애용하게 되었어도 우리는 머리통을 으스러지게 누르는 할머니의 모습에 희망을 봤다. 우리 할머니가 아직 안에 있나 라는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우리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엄마 정신이 들어?”와 “할머니 정신이 들어?”였다.
세상에서 제일 정신없는 사람에게 우리는 묻고 또 물었다.

할머니를 씻길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에 한정됐다. 기저귀를 가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실수한 할머니를 엄마 혼자 씻겨야 할 때도, 끙끙거리며 안간힘을 쓰면서도 엄마는 홀로 해결하며 문틈 사이로 내게 말했다.
“설사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네 할머니는 절대 너희에게 내 이런 모습을 안 보여줬을 사람이다.”

할머니의 존엄성을 지킨 대가로 엄마와 아빠에게는 이른 관절염과 척추성 질환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5년 동안 그들의 눈 밑은 검게 물들어 갔고, 얼굴은 점차 누렇게 변해갔다. 보호자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치매 환자의 특성상 할머니와 함께 집안 세상에서 사회의 모든 것과 단절되어갔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오기 전, 할머니의 망연자실한 눈빛이 의미하는 파국을 예견하지 못한 채 방학은 금방이라고 웃으며 시차를 두고 유학길에 나선 우리 남매는 해마다 죄인이 되어 침몰해가는 난파선에 올라탔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첫 해 방학에는 아이고 네가 어떻게 그 먼데서 왔냐고 나를 붙잡아 울었고, 이듬해 방학에는 우리 손녀는 호랑말코 같은 양키네서 공부하고 있는데 댁은 누구시냐고 물었고, 세 번째 해의 긴 여름 방학이었던가 아니 네번째해였던가는 학교에서 손녀딸이 아직 안돌아와서, 찾으러 나가야 한다고 뜻 모를 소리를 하였는데, 그 학교가 중학교였는지, 고등학교였는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다. 그 후로는 유치원 시절이나 혹은 더 어린 남매가 그녀와 함께 남아있었다.

“누구세요?”
어느 날 밤에 제방에서 들고 온 짐을 푸는 동생을 올려다보며 할머니는 묻고 또 물었다. 그 어린 것을 어디다 빼돌리고 당신이 이 방에 있느냐고 당신이 과거에 우리에게 말해준 이수일과 심순애의 심순애처럼 다 커버린 그의 바짓단을 쥐고 흔들었다. 동생은 잠자코 할머니를 등에 업어주었다. 같은 자리만 돌던 동생의 고개는 아주 오랫동안 하늘을 향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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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가 진행된 지 5년이 넘어가면서 노환이 오고 쇠약해진 할머니를 더 이상 집에서 간병하기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따라왔다. 할머니는 수십 번 고비마다 달려오는 히포크라테스와 나이팅게일의 후예들 덕분에 나머지 2년을 버틸 수 있었다.

2015년 국제알츠하이머협회에서는 ‘여성과 치매’라는 주제에서 치매가 걸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요인들로 높은 학력수준(계속 공부할 것, 머리를 쓸 것), 사회활동과 적극적인 여가활동을 꼽았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할머니, 홍묘순이 치매에 걸린 이유는 단 하나. 우리에 대한 사랑과 희생 때문이었다. 물론 할머니는 소학교에 하루 가본 적은 있었으나 학교에 다녀 본적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신문 한부를 정독했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했으니 공부로 예방하는 것은 패스했다고 쳐도, 사회활동과 적극적인 여가활동- 이 부분이 문제였다. 할머니는 우리를 돌보는 것에 어떤 사명을 가지고 일생을 건 사람이었다. 옛날 주택에 살적에도 다른 할머니들처럼 나가서 모여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거나, 어딜 놀러가거나 한 적이 없었다. 여행도 가족과 함께 간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런 할머니가 당신만큼이나 늙어가는 개 한 마리와 하루 종일 집에 남았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늙어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부쩍 커버려 밖으로 도는 손주들. 할머니가 하루 종일 손주를 위해 정성껏 하던 일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되었다. 그녀를 정신없게 만들던 부산스러움도, 매일 안고, 안기고, 매달리던, 쓰다듬고, 쓰다듬어 달라던 살 냄새도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바쁘지 않았을 것이다. 소란스러움도 시끄러움도 부산스러움도 사라진 고요한 정적 속에서, 텔레비전 보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던 나의 할머니는 조용히 사라져 갔을 것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큰 아들만은 끝까지 잊지 않고 갔다. 아버지가 “내가 누구야?”라고 물어보면 항상 “내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고 부둥켜 잡은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영원한 은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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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 약 710만 중 약 72만, 곧 10% 정도가 치매환자로 추정(보건복지부 노인 정책과 2017 통계자료)된다. 2015년 조사된 수치보다 약 5만 가량이 급등한 것에 우리가 미리 놀랄 필요는 없다. 80세 이상 노인 3명중 한 명이 치매라는 조사자료(보건복지부)에도 우리는 기겁할 필요가 없다. 고령화의 시계가 빨라지기 시작한 이상, 이 수치는 더욱더 빠른 쪽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리고 72만 × 4= 288만.
288만명이다. 치매환자의 약 72%는 가정 안에서 돌봄을 받는다는 조사에 근거해 볼 때, 가정 안에서 그들을 간호하는 보호자들 역시 간병 과정을 통해 치매환자들에 견줄만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경험하기에 된다. 이에, 대략 환자와 관계된 가족들을 4명이라고 가정한다면, 실제 치매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 이들은 약 288만명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라고 해서 다음 전투가 두렵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다만 나는 정말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무척 많이 바라고 있지만, 혹시 다시 참전해야하더라도, 미리 겁을 집어 먹지는 않을 생각이다.

다만 우리가 인간적인 이별을 할 수 있게 되길. 개인과 사회 정부가 함께 싸워주길. 내가 그리고 당신이, 이 치매라는 사악함에 대항할 때, 우리 가족안의 정신없는 이를 사랑했던 지고지순했던 내 사랑을, 내 마음을 어떠한 시련이 와도 내가 잃지 않기를. 그리하여 어떠한 고통과 공포가 와도 이 환자를 보호할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다.

그를, 그녀를 가족으로서 사랑할 수 있기를, 과거의 그가 가졌었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환자, 당신보다 건강하기를 기도할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이수진]

 이수진

 영어강사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감사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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