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실루엣이 점점 또렷하게 재생이 됩니다. 어느 날 오전, 조용한 방안에서 원고를 쓰던 중 문득 헛기침을 했는데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나의 귀에 들린 기침소리는 바로 예전에 늘 듣던 그리운 아버지의 기침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오래지만 아버지는 먼 길을 일부러 떠나지 않으시고 이 아들의 삶속에 그대로 머물러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일찍 엄마 잃은 아들이 얼마나 측은하고 가련했으면 이날까지 그대로 아들의 몸속에 머물러 계셨던 것일까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가 참으로 절박했던 그 시절로 훌쩍 돌아가 봅니다.

(뒷줄우측) 나의 아버지 이현경 ©이동순

나의 가문은 연안 이씨! 흔히 연리(延李)란 말을 쓰곤 합니다. 시조는 당나라 때의 중랑장 벼슬을 지낸 이무(李茂) 장군입니다. 고려, 조선시대를 지내오며 그 후손들이 정승과 판서 등 큰 벼슬아치를 가장 많이 배출했던 가문이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조선왕조 인조 때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청호(靑湖) 이일상(李一相) 등 3대에 걸쳐 잇달아 대제학을 지낸 집안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명문벌족들인 광산 김씨, 남양 홍씨 등의 가문에서는 연안 이씨와 통혼하는 것을 은근히 소망하면서 자신들의 가문을 자랑할 때 광김연리(光金延李), 혹은 남홍연리(南洪延李) 등의 방식으로 연안 이씨와 반드시 함께 엮어서 드러내곤 했지요.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의 고전 ‘춘향전(春香傳)’에서 중심인물 이도령, 즉 이몽룡(李夢龍) 집안도, 군담소설 ‘박씨전(朴氏傳)’에 등장하는 박씨 부인의 남편 이시백(李時白)도 모두 연안 이씨로 나오더군요. 근대로 넘어오면서 독립운동가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선생, 시조시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선생, 국어학자 심악(心岳) 이숭녕(李崇寧) 박사를 비롯해서 최근의 사학자 이이화(李離和) 선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안 이씨 집안이 배출한 인물들이더군요.

우리 가문은 연안 이씨 부사공파입니다. 여기서 부사공이란 고려시대의 통례문(通禮門) 부사(副使)를 지낸 이지(李漬) 선생을 가리키는데 나는 그 할아버지의 22대 손입니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이명균(李明均, 1863~1923) 선생, 아호는 일괴(一槐). 조선 후기 감역(監役) 벼슬을 했던 증조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일정한 재산을 누리며 김천 상좌원 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 것은 할아버지가 일천석(一千石)이 넘는 살림을 누리는 부호로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강탈당한 조국의 주권 되찾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부호들은 어김없이 제국주의 식민통치권력과 영합해서 그들의 기득권을 비겁한 굴종으로 유지 보호받으려 했었는데, 조부님께서는 전혀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하셨지요. 이로 말미암아 겪게 된 고난은 말로 형언할 길 없고 마침내 가문의 철저한 몰락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1923년에 돌아가신 조부와는 이승에서 단 한 번의 면식조치 없지만 그 조부께서도 학자와 시인으로서의 손자가 세상 살아갈 올바른 길과 정신적 지침을 늘 바람결에 일러주고 계십니다.

조부 일괴공 이명균 의사의 초상과 간찰 ©이동순

첫째 부인 옥산 장씨 할머니가 위로 아들 넷을 낳고 별세한 뒤 성산 여씨가 금선(琴線)을 이어서 아래로 6남매를 낳았습니다. 예전 호적에서 여성들은 구체적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오로지 성씨로만 표시했을 뿐입니다. 도합 9남1녀! 전처소생의 아이들까지 도맡아 기르셨던 할머니의 노고가 얼마나 대단하셨을 것이라는 것을 이로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아들만 아홉인 형제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의 성품은 어려서부터 유별났다고 합니다. 천석 살림의 부자이면서도 모든 재산을 조국의 독립제단에 군자금으로 바쳤던 할아버지께서는 자식들로 하여금 일본식교육을 받지 않게 하려고 신식 학교에 아예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김천 상좌원 마을 성주골 뒷산의 서당에서 아버지는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통감(通鑑)’ 따위를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 형제들 중 성격이 유난히 별나서 할머니가 새로 지어 입힌 옷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벗어 시궁창에 처박아 넣었다고 합니다. 당신의 부모님께 얼마나 대책 없는 말썽꾸러기였을까요? 이 성품이 장성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있어서 집안에 송사가 있을 때 가장 선두에서 활동하다가 온갖 모욕을 겪은 적도 있었지요. 그야말로 걸핏하면 정(釘)을 맞는 모난 돌이라 하겠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던 할머니 여성산 여사 ©이동순

조부께서는 친일부호들에게 군자금을 강제로 징발하는 ‘의용단사건(義勇團事件)’으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미결수로 복역하다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사망 일보 직전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고향집에 돌아오셨지만 끝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 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어른을 피눈물로 시봉하셨던 할머니 성산 여씨! 할아버지가 대구형무소에 갇혀계실 때 할머니는 수시로 면회를 갔는데, 그때마다 고문으로 온통 피 걸레가 된 수의(囚衣)를 받아오셨다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부께서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독립운동가 묘역에 계시고, 후손들은 그 유족으로 가슴 속에 뿌듯한 자부심을 지니게 되었지요.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아홉 형제들은 제각기 유산을 상속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맏형이 급한 용무 있다며 인감을 빌려간 뒤 모든 재산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던 것이지요. 내가 어렸던 시절, 아버지께서는 주로 명절날 아침 음복을 하신 뒤 술기운만 오르면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꺼내곤 하셨습니다.

1922년 12월30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의용단사건 관련 기사 ©이동순

아버지는 열여덟 살에 달성군 현풍면 지동(池洞, 못골)에서 태어난 서흥 김씨 후손의 김기봉과 혼인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집 택호는 지동댁(池洞宅)이었습니다. 도합 여섯 남매를 낳아 기르셨는데, 그 중 맏이와 다섯째는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두 가난과 불결한 환경 속에서 질병으로 잃었는데, 특히 다섯째 아들 종덕(鐘德)은 네 살 때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돼지를 막대기로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그 총명함이 못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내 바로 위의 형입니다. 이날까지 살았다면 얼마나 의지가 되는 든든한 존재였을까 생각해봅니다.

일제말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양육하기에 너무도 힘이 부쳤던 것 같습니다. 일본으로 징용과 다를 바 없는 노무자모집에 지원해서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습니다. 가신 곳은 일본의 남부지역 고쿠라(小倉)! 발전소건설 현장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영화 ‘목포의눈물’을 보러가던 길에(1956) ©이동순

70여 년 전 한 식민지청년이 현해탄을 건너 와
삐걱거리는 내륙열차를 타고 도착했던
일본 고쿠라
그곳 발전소에서 잡역부로 일했던
한 조선청년의 땀과 눈물과 고독을 생각한다
그 청년은 나의 아버지다
멀리 보이는 굴뚝에서
흰 연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그 굴뚝 언저리 어딘가에 아버지의 발전소는 있었으리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무거운 등짐을 지고 힘겹게 걸어가는
청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시 ‘고쿠라 역을 지나며’ 전문

어느 해 일본여행길에 고쿠라 역을 지나는데 표지판을 보노라니 아버지 생각이 왈칵 사무쳐서 열차 안에서 바로 쓴 시입니다. 일본에서는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목수, 미장(美匠) 등 주로 토목 관련 막노동에 종사했고, 고생도 죽을고비도 엄청 여러 번 겪으셨다고 합니다. 해방 직전 가까스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를 탈 수가 있었는데 영영 돌아오지 못한 불쌍한 동포들에 비하면 그나마 큰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가장이 없는 동안 어머니께서는 어린 자식들 주린 배를 채우느라 날이면 날마다 고생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숙모님들 증언에 의하면 눈이 하얗게 쌓인 동지섣달에도 발에 꿸 신발이 없어 맨발로 눈길을 걸어 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그 적빈(赤貧)의 애달픔에 지금도 목이 멥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동서들과 함께 둘러앉아 품앗이를 하다가 잠시 쉴 때면 그 힘든 시간을 노래로 잊으려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요. 어머니 차례가 오면 늘 도리질을 하며 노래를 완강하게 거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숙모들은 짓궂게 어머니를 졸라대었는데요. 노래를 부르지 않을 량이면 배 구멍이라도 한번 보여 달라고 말입니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머니의 배 구멍은 출생 직후 탯줄을 길게 잘라서 배 밖으로 불룩 튀어나온 모습이었다고 하네요. 그 배 구멍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어머니는 억지로 노래를 부르셨다고 하는데, 그 노래가사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민요로 짐작이 됩니다. 여기저기서 아무리 검색해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분위기를 바탕으로 시작품을 엮어보았습니다.

1959년 대구 서내동 시절 아버지와 함께 ©이동순

일괴공 조부께서는
아홉 아들들 모두 쑥대 같았으나
며느리는 하나같이
키 낮은 앉은뱅이꽃이었다
집안 대소사에
여덟 숙모들 모인 모습은
달걀꾸러미의 달걀처럼 가즈런하였다
그 숙모들 거의 다 돌아가고
‘명주 전대 꽃 쌈지에
돈 닷 푼 싸서 들고’ 라는 노래를
즐겨 흥얼거렸다는 어머님마저 돌아가신 후
이제 상좌원 연안 이씨
번성하던 집안은 텅 비었다
못난 종손 태어나
백구두 신고 서양춤 추러 다니더니
급기야 집터에 위토답까지 다 팔아먹었다
지난 성묘 길에
쓸쓸한 고향마을을 찾았더니
팔순 가까운 봉계숙모가 혼자 남아
양지바른 앞마당에 맨발로 마늘씨를 놓고 있었다
늦가을 외진 구석에 혼자 남은
마지막 한 송이의 앉은뱅이꽃이시여
-시 ‘민들레꽃’ 전문

일본에서 지녀온 얼마간의 돈으로 고향마을 한밭에 논을 여섯 마지기를 구입하고 아버지는 전업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난봉꾼 형에게 전 재산 다 빼앗기고 알거지 신세로 지내다가 이제 드디어 당신 소유의 땅이 생겼으니 그 얼마나 감격이었으리오. 아버지는 날마다 지게를 지고 돌을 날라서 하천의 물이 논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혼자 힘으로 석축과 제방을 쌓았습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와 고향마을에 가서 여름방학을 보낼 때 그 돌로 쌓은 물막이 보(堡)에 앉아서 아버지가 논에서 즐겁게 일하시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 일을 마친 아버지는 바짓단을 둘둘 걷고 시냇물로 들어가 징거미(민물새우)를 많이 잡아서 양은냄비에 끓여주셨는데 그 맛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무를 나박나박 잘게 썰어서 약간의 파 마늘과 고춧가루를 넣고 끓였을 뿐인데 어찌 그리도 달고 시원하던 지요.

아버지의 음식솜씨는 혼자 일본에서 노동자생활을 하던 시절부터 익히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6·25전쟁 직후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된 뒤로 음식솜씨는 더 확장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기의 하나였던 미군정기가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시골마을에서 그 혼란이란 오직 경제적 곤궁함으로만 조여 왔을 뿐입니다. 좌우익 대립과 갈등은 한 가문에도 폭풍처럼 몰아닥쳤고 큰집 사촌형이 특히 맑스 레닌주의에 심취했습니다. 항상 오뉴월 보리밭 가운데로 청년들을 데리고 들어가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읽고 토론을 벌였다고 합니다. 말이 사촌 형이지만 나이는 조카인 아버지보다 많았습니다. 아버지뻘의 그 형은 전쟁 전에 이미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소문에는 남로당 직책을 지니고 북으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순국선렬 묘역의 할아버지 묘소 ©이동순

전쟁의 기운은 무르익어가고 마침내 6·25가 터져서 1950년 파괴와 학살 광풍이 삼천리강토에 휘몰아쳤습니다. 전쟁 발발 무렵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불과 8개월의 태아였습니다.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걸음조차 걷기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김천 구성면 상좌원 마을에 북한군이 들어오게 된 것은 그해 8월 초순입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대나무를 쪼갠 형세로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영남지역까지 내려왔습니다. 고향마을 구장(區長, 당시엔 이장을 이렇게 불렀습니다)은 황급히 마을 골목을 다니면서 외쳤습니다.

“빠른 시간에 마을을 비우고 피난길을 떠나세요!”

이른바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진 것입니다. 공습이나 화재 등에 대비하기 위해,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물자, 시설물 등을 분산시키는 국가의 명령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전쟁보다 더 크고 무서운 사태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가족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몸이 무거운 임산부가 있었던 지라 먼 길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 위급한 전시상황에서 엉거주춤 그대로 집에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죽음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을주민들은 모두 뿔뿔이 풀씨처럼 흩어졌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만삭의 어머니를 보살피며 피난길을 떠났는데, 마을에서 약 8km 가량 떨어진 문중의 종산을 관리하는 산지기집이 목표였습니다. 나실(羅室)이라는 산언저리가 바로 그곳입니다. 길인들 평탄하였겠습니까? 점점 갈수록 경사가 꽤 험하고 가팔라지는 산 고갯길을 시름없이 걷고 또 걸어서 당도했을 것입니다. 걸음이 불편한 어머니 때문에 가다가 쉬고 가다가 또 쉬곤 했을 것입니다. 당시 어머니의 고생을 마음속으로 헤아려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때 벌써 심신의 골병을 얻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출렁거리며 산길을 올랐을 것입니다.

해발 900m가 넘는 산지기 외딴집에 도착해서 비좁은 농막 한 곳에 온가족이 들어가 산지기네 가족들과 더부살이합니다. 그야말로 초가삼간에 불과한 그 오두막에서 두 가족이 바글바글 몰려 살았을 터이니 불편함이야 오죽하였으리오. 하지만 산지기가 일군 텃밭이 있어서 푸성귀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고, 곡식은 귀해서 나물과 곡식 몇 줌을 넣은 갱죽을 끓여 여러 식구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을 것입니다. 멸치나 고기 등 육류는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고, 오직 씨감자나 구워먹으며 주린 배를 달랬을 것입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일괴 이명균 선생 순국기념비, 이명균 선생 유허비, 김천 고향마을에 세워진 이명균 선생 동상 ©이동순

어머니는 산지기네 외딴집에 힘겹게 당도해서 곧 몸을 푸셨습니다.

그해 피난 가서 내가 너를 낳았구나
먹을 것이 없어 날감자나 깎아먹고
산후구완을 못해 부황이 들었단다
산지기집 봉당에 멍석 깔고
너는 내 옆에 누워 죽어라 울었다
그해 여름 삼복의 산골
너희 형제들은 난리의 뜻도 모르고
밤나무 그늘에 모여 공깃돌을 만지다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포성에 놀라
움막으로 쫓겨 와서 나를 부를 때
우리 출이 어린 너의 두 귀를 부여안고
숨죽이며 울던 일이 생각난다
어느 날 네 아비는 빈 마을로 내려가서
인민군이 쏘아죽인 누렁이를 메고 왔다
언제나 사립문에서 꼬릴 내젓던
이제는 피에 젖어 늘어진 누렁이
우리 식구는 눈물로 그것을 끓여먹고
끝까지 살아서 좋은 세상 보고가자며
말끝을 흐리던 늙은 네 아비
일본 구주로 돈벌러 가서
남의 땅 부두에서 등짐지고 모은 품삯
돌아와 한밭 보에 논마지기 장만하고
하루 종일 축대 쌓기를 낙으로 삼던 네 아비
아직도 근력 좋게 잘 계시느냐
우리가 살던 지동댁 그 빈 집터에
앵두꽃은 피어서 흐드러지고
네가 태어난 산골에 봄이 왔구나
아이구 피난 피난 말은 말아라
대포소리 기관포소리 말도 말아라
우리 모자가 함께 흘린 그해의 땀방울들이
지금 이 나라의 산수유 꽃으로 피어나서
그 향내 바람에 실려와 잠든 나를 깨우니
출아 출아 내 늬가 보고접어 못 견디겠다
행여나 자란 너를 만난다 한들
네가 이 어미를 몰라보면 어떻게 할꼬
무덤 속에서 어미 쓰노라
-시 ‘서흥 김씨 내간(內簡)’ 전문

1950년 여름, 당시의 광경을 시작품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무덤 속의 어머니가 이승의 아들에게 보내는 내간(內簡), 즉 편지글 형식을 사용해서 영남지역 내방가사의 4.4조 율격형식으로 풀어 쓴 서사적(敍事的) 형태의 작품입니다. 이 시를 쓸 때 나는 어머니의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고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입니다. <계속>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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