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지난주 경북 경주에서는 흥미로운 세미나가 열렸다. ‘역사도시 유적 주변의 공공건축, 도전과 과제’가 주제였다.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에서는 요즘 황룡사역사문화관이 논란을 빚고 있다. 황룡사가 자리잡은 곳은 신라시대에는 경주 왕경의 한복판이었다. 하지만 지금 황룡사 터를 비롯한 일대는 거대한 폐허나 다름없다. 절집 주춧돌과 불상 대좌만이 쓸쓸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농촌마을의 논 한복판에 세워진 나홀로 아파트같은 인상을 주는 전시시설이 이런 옛 절터의 분위기와 어울리느냐 하는 것이다.

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서동철

시인 장석남은 ‘경주 황룡사터 생각’에서 ‘종달샌지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가라앉고/ 주춧돌들 나란히 나란히 무릎 꼭 오그리고 제자리 앉았는 자리마다/ 하늘도 그 주춧돌의 하늘로서 하나씩 하나씩 서 있었습니다’라고 노래했다. 황룡사의 주춧돌들은 건물을 이루는 부재라기보다, 각각이 하나의 우주로 자기의 하늘을 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짐작한다. 하지만 역사문화관이 들어선 이후에도 같은 시상을 떠올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

세미나의 부제는 ‘경주 월성 발굴조사 운영시설 건립사업을 중심으로’였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부터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을 발굴조사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문터 발굴에서 성벽을 쌓을 당시 살아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 인신공양의 증거를 찾아내기도 했다. 월성 밖 해자를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터번을 쓴 서역인 모습의 토우(흙인형)를 비롯해 신라시대 관직 이름이 적힌 목간 등 중요한 유물을 여럿 찾아냈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간은 종이 사용이 쉽지 않았던 시대 기록용 도구로 널리 쓰였다.

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성 발굴조사를 2023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었다. 발굴은 박근혜 정부가 정치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경북 지역의 민원을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민들은 월성을 하루빨리 복원해 관광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하지만 신라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조사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초고속 발굴이라는 비판론이 불거지면서 최근에는 사실상 속도조절에 들어갔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과 제2차 세계대전 강제이송 희생자 추념관. 추념관은 오른쪽 강변의 삼각형 대지 지하에 지어져 보이지 않는다. ©추념관 인터넷 홈페이지

장기적인 발굴조사가 필요한 만큼 경주문화재연구소는 현장 주변에 조사단의 연구공간과 관람객을 위한 전시공간, 출토 유물의 수장공간 기능을 함께하는 전시관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건축 설계안은 공모 절차를 거쳐 최근 당선작이 확정됐다. 뽑힌 작품은 한옥의 이미지를 살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옥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현대적 건축물이다.

하지만 건축 허가를 내주어야 할 경주시는 ‘월성의 현대적 건축물’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경주시는 ‘유적 주변의 건축물은 한옥으로 지어야 한다’는 조례도 두고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역사도시의 경관을 살리겠다는 취지의 조례를 만든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월성 전시관 건립 계획이 궤도에 오르면서 공공기관이 경주 왕경의 핵심지역에 짓는 건물은 예외로 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 제기된 것이다.

‘역사도시의 건축물은 꼭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경주시의 한옥 조례는 전통적인 건축 양식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월성 전시관을 지으려는 사람들은 과거와 조화를 이르는 새로운 건축물을 추구하고 있다. ‘역사도시…’ 세미나는 두 개의 다른 의견 사이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독일 쾰른 대성당과 루트비히 미술관. ©루트비히 미술관 홈페이지

그런데 유럽의 역사도시들은 뜻밖에 매우 과감하게 새로운 양식의 건물들을 유서 깊은 건물 곁에 세우고 있다. 사실 아무리 역사적인 도시라도 사람이 살고 있는 한 지금도 겹겹이 역사가 쌓여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베수비오스 화산의 폭발로 묻혀버려 한순간의 모습만 간직한 폼페이같은 도시가 예외라면 예외다. 따라서 ‘지금 이 시간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오히려 ‘죽은 도시’에 머물지 않는 ‘살아있는 도시’를 만드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관석 경희대 건축과 교수가 ‘유럽의 적층된 역사와 현대건축의 공존’이라는 제목으로 보여준 사례들은 인상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국민 20만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프랑스 정부는 1962년 ‘강제 이송 희생자 추념관’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바로 옆에 지었다. 지하 추념관은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지하에서 느끼는 전쟁의 억압과 죽음의 공포로 자유를 환기하겠다는 의도라고 한다. 지하 추모시설에는 더불어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절대적인 존중의 의미도 담겨있다는 것이다.

독일도 쾰른 대성당 바로 옆에 1974년 로마 게르만 박물관을 세웠다. 솟아오르는 대성당의 수직성과 대비되는 수평성으로 조화를 추구한 건축물로 유명하다. 대성당의 이미지를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건물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성공을 거둔 사례라고 한다. 쾰른 대성당 곁에는 1986년 루트비히 미술관도 지어졌다. 라인강에서 바라보면 대성당을 가로 막는 위치지만, 이 역시 자신을 낮추는 모습으로 조화를 이끌어냈다. 독일 남부의 울름 대성당 앞에 1993년 지어진 울름 슈타트하우스도 ‘겸양’으로 문화유산을 돋보이게 만든 사례로 꼽힌다고 한다.

독일 울름 대성당과 울름 슈타트하우스. ©울름대학교 홈페이지

유럽 역사도시의 새로운 건축물들은 과거의 건축과 현재의 건축을 갈등의 대상이 아닌,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상생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 감돌고 있는 ‘과거 옆에 현재가 와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는 민속촌이나 재현단지 뿐 아니라 명품 역사도시마저 박제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모방에 불과할 뿐 창조정신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건축물을 곁에 새로 짓는 것은 문화유산의 가치를 오히려 퇴색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주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공주·부여·익산 같은 백제의 고도가 그렇고, 조선 600년의 수도였던 서울도 다르지 않다. 왕도급 도시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는 적지 않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다. 그 유적 주변을 어떻게 가꾸어 도시의 품격을 높여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온전히 지방자치단체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경주의 고민은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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