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나이 탓’을 하는 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술집에 가면 망설임 없이 막걸리를 선택하게 됩니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주도했던 ‘막걸리 유행’이 시들해진지도 꽤 됐는데 웬 늦바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막걸리가 밥이여”라고 자주 말하던, 청년기에 몸담았던 건설현장 감독이 가끔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요즘은 전국의 막걸리를 함께 파는 술집이 꽤 여럿 있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이것저것 골라서 마셔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입이 둔감한 저도 이 막걸리 맛은 어떻고 저 맛은 어떻고 곧잘 구분해 낼 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가만 살펴보면 그 역시 몇몇 양조장에서 나오는 제품에 한정돼 있습니다. 전국의 양조장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입니다.

©플리커

며칠 전 후배와 함께 갔던 술집은 다른 면에서 관심을 끌었습니다. 한마디로 술 백화점이었습니다. 주 종목은 막걸리지만 청주나 증류식 소주도 많았습니다. 전통주를 빚는 주가(酒家)에서 운영하는 체인점인데, 우선 엄청난 양과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주종에 놀랐습니다. 병이나 포장도 얼마나 세련됐는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점포 한쪽의 유리 칸막이 안에는 발효 탱크가 설치돼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직접 술을 빚고 익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른 저녁인데도 손님이 무척 많았습니다. 술을 마시는 손님뿐이 아니었습니다.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들러 술을 사갔습니다. 집에서 마시거나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함께 간 후배는 외국인에게 선물할 일이 있으면 이곳에서 술을 사간다고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이미 두세 해 지난 이야기지만, 모 기관의 의뢰를 받아서 경상북도 지역의 우리 술 취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서 책으로 내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시골의 오래된 양조장을 순회하면서 참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양조장 주인들의 하나같은 하소연은 술을 만들어도 팔 곳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농어촌 인구가 줄어드는데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막걸리 대신 소주나 맥주를 많이 마시기 때문에 소비가 크게 줄었다는 것이지요.

판매 범위를 넓혀보려고 해도, 유통 능력도 문제지만 막걸리 특유의 유통기한 문제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생막걸리는 보통 4일 정도 발효한 미숙주(未熟酒) 형태로 시중에 내놓습니다. 맛을 위해 6~7일 발효시킨 완숙주 형태로 출고하는 양조장도 있습니다. 이렇게 시중에 나온 술의 유통기한은 기껏 며칠(서울 장수막걸리의 경우 냉장상태에서 10일)에 그칩니다. 유통기한을 늘릴 수 있는 살균막걸리도 있지만, 사람들이 생막걸리를 더 선호한다는 현실을 차치하고라도 시골 양조장이 그런 시설을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픽사베이

애로사항은 또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만난 70대의 양조장 주인은 개진개진 젖은 눈으로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관(官)에서 지시한 시설 개체가 문제였습니다. 2010년 주류 위생 및 안전관리 업무가 국세청에서 식품의약품안전처로 이관되면서 규제가 심해졌다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시설을 규격에 맞게 바꿔야 하는데, 하루에 술 몇 통씩 파는 시골 양조장으로서는 비용을 조달할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이지요. 다른 문제도 있었습니다. 일괄적인 기준에 의해 시설을 바꾸도록 했기 때문에 양조장마다의 특성이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집집마다 된장 맛이 조금씩 다르듯, 생막걸리는 양조장마다 맛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지요. 물론 원료 배합이나 누룩, 물, 첨가물 등이 맛을 좌우하지만 효모가 살아있는 시설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막걸리는 이 땅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술 중 하나입니다. 술을 빚어 청주를 떠내지 않고 그대로 거른 뒤, 적당량의 물을 섞어 다시 거른 술을 일컫습니다. 막(마구, 거칠게) 거른 술이라고 해서 막걸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지만, 저는 막(금방) 걸러낸 술이라 막걸리라고 한다는 설에 더 마음이 갑니다. 막걸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이 땅의 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해왔습니다. 노동의 현장에서 힘을 북돋워주기도 했고 마을사람들끼리 정을 나누고 소통을 하는 매개체 역할도 했습니다. 경사든 애사든 잔치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막걸리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 따라 어느덧 천덕꾸러기가 된 것입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챙겨야 것도 많고 각종 요구사항도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시골 양조장의 형편까지 헤아려달라고 하기는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막걸리를 살리자’고 캠페인을 하는 것도 흘러간 물을 되돌리는 것 같아 달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서민들과 함께 해온 양조장이 하나 둘 문 닫는 모습을 보다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온갖 사연도 함께 묻는 것 같은 마음입니다. 관련 부처에서는 유통이나 시설 등에 개선하고 지원할 점이 없는지 한번 챙겨봤으면 좋겠습니다. 앞에 말한 전통주 체인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도 좋을 것 같고요. 도시에서 내 고향의 맛을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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