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완의 애, 쎄이!]

18살의 나는 주말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매주 광화문으로 뛰어나갔다.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뚫려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광화문에 나가면 나와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말했다. ‘태어나서 한 건 공부밖에 없는데, 놀지도 못하고 죽을 수는 없어요.’ 매주 광화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지만 대통령은 귀를 막고 자기 멋대로 정책을 진행시키는 2008년이었다. 후에 성인이 되어 광우병사태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긴 했지만, 당시 18살의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좀비바이러스가 퍼져나간 대한민국이 될까봐, 가끔씩 눈물을 흘리면서 잠들곤 했다.

작년 1월1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참배를 마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차에 타고 있다. ©포커스뉴스

19살의 나는 글짓기 대회에 나가려고 짐을 싸다가, TV 앞에 멈춰 섰다. 토요일인가, 일요일 아침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던 사람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가만히 서서 TV를 보았다. 자살한 사람을 처음 안 것도 아닌데, 그냥 계속 서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대회에 나가서 글을 쓰는데도 계속 기분이 이상했다. 슬픈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무엇이 와장창 부서진 기분이었다. 그해 고3을 보내면서 많은 친구들이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녔다. 매일 알 수 없는 정치 얘기를 하던 친구는 어느 때에 갑자기 울먹였다. 그 친구는 대통령의 장례식도 다녀왔다고 했다.

22살의 나는 대선 투표일에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인증샷도 찍고 집으로 돌아와 깔끔하게 방청소를 하고 치킨을 시켰다. 선배들이 말했다. 이번엔 바뀔 거라고, 그리고 만약에 바뀌지 않으면 이민 준비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고. 이민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런 일은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치킨을 기다렸다.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고, 엄마는 탄식을 했다. 나는 ‘아닐걸! 아닐 수도 있어!’라고 말했다. 희한하게 출구조사가 발표되고 나서야 치킨이 왔다. 앞서나가지 않는 표 차이를 보면서 파티를 하려고 시킨 치킨에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었다. 나는 그 다음날 단단히 배탈이 났었다. 그래도,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대통령이고 아버지와 다를 것이며 국민 다수의 선택이니 받아들이고 5년을 나아가자고 다짐했었다.

2017년이 되었다. 장미대선이 있었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흐릿흐릿한 기억들이 그나마 또렷해질 시기인 7, 8살 가운데에는 IMF가 있었다. IMF가 무엇인지 몰랐고, 그냥 매일 뉴스에서 금모으기 운동과 은행 앞에 주저앉은 어른들을 보았다. 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나바다 운동’을 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한강의 기적’이라는 기분 좋은 단어를 들으면서 월드컵을 응원했다. 2000년대부턴 천만관객 영화들이 나왔다. 아빠 엄마 손을 잡고 극장에 가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봤다. 전장 한가운데서 기억을 잃은 장동건을 흔드는 원빈의 얼굴은 정말 멋있었다. 15살에는 친구들과 처음으로 대한극장에 가서 「왕의 남자」를 봤다. ‘15세 관람가’ 영화였는데, 혹시나 극장 앞에서 잡힐까 조마조마해 하면서 영화관에 들어섰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3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뇌물혐의 관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생각해보면 나의 10대는 ‘중2병 필터’가 적용되어서 그 어느 시절보다 자유롭기도 했지만 사회 자체가 나름 자유로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았고, 잡음이 있긴 했지만 남북관계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내 핸드폰이 검열 당하고, 내가 위험에 빠져도 국가는 나를 외면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진 않았다. 사춘기를 지나서 입시 시즌으로 들어서자 서울시장을 했던, T-money를 만들었다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있었다.

중2병 소녀는 사회반항아가 되어갔다. 왜 경쟁해야 해? 왜 국민의 말을 안 들어줘? 나는 09년도에 수능을 봤는데, 그 당시 논술 고사의 주된 주제는 ‘소통’이었다. 불통 시대를 겨냥한 주제였다. 나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은 자유로움이 두려움과 구속으로 바뀌는 시간이었고, 자유로운 발언이 검열 당하는 세계로 퇴행하는 시기였다. 그 시간동안 아무 것도 몰랐던 10대는 투표권을 얻고 목소리를 내는 20대가 되었다. 내가 성장하면서 보고 느꼈던 세계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청와대의 문은 이미 오래 전에 닫혀있었다.

대통령은 질문을 받지 않았다. 대통령 주위의 사람들은 대통령 아버지 옆에 있었던 사람이거나, 그의 수첩 속에 오래 전부터 적혀있던 사람이었다.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구조 헬기는 침몰하는 배 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침몰한 배에 사람이 갇혀있는데, 대통령은 7시간 동안 보이지 않았다. 국가에 전염병이 도는데, 정부는 무능했다. 감염자는 늘어나고 애꿎은 낙타는 갇혀있고 말도 안 되는 괴담이 돌았다.

매년 흔들렸다. 나는 점점 성장해서 한 명의 개인이 되어 갔지만 내가 살아왔고 알아가고자 했던 국가는 자꾸만 후퇴했다. 해가 지날수록 국가를 버리고 싶었다. “‘지옥 같은 나라’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라 같은 지옥’이라고 생각해봐요. 그럼 좀 살만 하지 않나요?” SNS에서 봤던 우스갯소리를 매일 되뇌면서 하루를 살았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야, 아파서 죽어야하는 청춘인데 뭐. 있는 것들은 대대손손 잘 살 거야. 역전 같은 건 없어.’ 그런 목소리들이 뭉치고 뭉쳐서 작년 가을부터 광화문을 흔들었다.

내가 노오력하지 않은 게 문제가 아니었다. 역전할 수 없는 시스템이 문제였고, 국정을 운영하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 문제였다. 경쟁하고 서로를 헐뜯고 매일 울어야 했던 국민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다수는 현명했고, 힘이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추도사를 하고 있다. ©노무현재단

길고 긴 9년이었다. 파랗던 강물이 진녹색으로 변할 만큼의 습하고, 답답한 시간들이었다. 힘겹게 얻은 변화의 시작점이다. 단 한번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완벽한 사람, 완벽한 대통령은 없다. 멈춰서 썩어가던 이 세계를 움직이게끔 기름칠을 시작해줄 사람이면, 현재로써는 감사하다. 하지만 왠지 시작이 좋다. 가끔 불안하고, 화도 나지만 우리의 일상이 그러하듯 5년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며 이 세상은 굴러 갈 듯하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목소리를 내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국가를 외면한 국민에게 권리는 없다.’ 간단하지만 무거운 한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정말 수고했다. 9년 동안. 사는 동안. 답답했지만, 지쳐있었지만, 정말 잘 견뎌 왔다. 이제는 더 잘 살 수 있다. 자유롭고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올 수 있는 세상일 될 거라고, 목소리를 내는 바른 어른들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는 그럴 만한 힘과 촛불을 지닌 국민이니까. [오피니언타임스=우디]

 우디

 여행, 영화, 글을 좋아하는 쌀벌레 글쟁이.
 글을 공부하고, 일상을 공부합니다.
 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지향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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