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인의 풍수지리]

남한산성에 남아있는 바위글씨를 찾아서 탐방길에 올랐다. 남한산성에 널리 퍼져 있는 바위글씨를 찾아보니 지금은 거의 방치되고 있으나 이것들을 잘 연구하고 정리하면 훌륭한 문화재가 될 것 같다. 서양은 석조문화라 옛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는 목조문화라 대부분의 문화재가 사라지고 몇 개만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 뒤의 바위글씨 반석(磐石). 병자호란 누란의 위기에서 종묘사직과 나라를 반석과 같이 튼튼히 지켜야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정인

남한산성 행궁에 가면 반석(磐石)이라는 바위글씨가 행궁 뒷편에 있는데, 병자호란 당시 누란(累亂)의 위기에 처하여 종묘사직과 나라를 반석과 같이 튼튼히 지켜야 한다는 뜻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한다.

행궁 뒤 계곡에 위치한 옥천정 바위글씨. 계곡의 아름다움을 바위글씨로 노래했다. ©김정인

행궁 우측 계곡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정자가 있을법한 계곡에 여러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행궁 뒤 계곡의 정자 터에는 옥천정(玉泉亭)이라는 바위글씨가 있는데 옥천정세정축작(玉泉亭歲丁丑作)이라고 쓴 글씨가 있어 순조 17년(1817)년에 쓰여진 것을 알 수가 있다. 광주 유수 겸 수어사였던 두실거사 심상규(영조42 1766~헌종4 1838년)가 지은 정자로 추정된다.

‘늙은 소나무 귀한 바위 구름 속에 가려져 있어 천년세월 산신령의 가호를 받았구나. 훗날 한가로이 잠 잘 곳을 찾고자 하거든 시원한 달 빛 가을 물결, 이는 옥천정이 그곳이다, 두실거사 짓다’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수어장대와 서문 사이의 산에도 바위가 있는데 정조3년(1779년)에 50여 일 간 산성을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바위글씨에 남아 있다.

동문 옆 동암문 시구문을 나서 240여 미터를 내려가면 계곡에 정조대왕이 쉬어간 기해주필암이 있다. ©김정인

남한산성 동문 옆 암문 시구문을 나가 240여 미터를 내려가면 기해주필(己亥駐蹕, 기해년에 임금의 행차가 잠시 머문 곳)이라고 쓴 주필암이 있다. 정조대왕이 여주의 영릉(효종대왕릉, 정조의 5대조 왕릉)의 2주갑(120년) 참배 길에 남한산성 행궁에 들려 쉬어가던 곳이다. 정조 3년(1779년) 남한산성 바위에 기해주필수어사신김종수봉교서(己亥駐蹕守禦使臣金鍾秀奉敎書)라고 바위글씨를 남겼다.

남한산성 동문 밖 계곡에 위치한 기해주필 바위. 여주 효종대왕릉 2주갑(120년)인 1779 기해년 참배길에 남한산성에 들려 정조대왕이 잠시 머문 곳이라는 기해주필(己亥駐蹕) 바위글씨를 남겼다. ©김정인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행궁과 성벽은 보수 관리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바위글씨들은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바위글씨 중에 으뜸은 기해주필의 주필암인데 도로변과 계곡 사이에 펜스가 쳐 있어 접근도 어려우며 시구문을 통하여 계곡을 따라 내려 갈 수 있으나 산책로조차 확보되지 않고 있어 위험하다. 바위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 표지석이 있으나 계곡물에 쓸려 내려갈 수도 있어 문화재의 유실이 염려된다.

주필암이 위치한 곳은 정조대왕이 이곳에 쉬면서 언덕 위에 아름다운 소나무를 보고 감탄하여 벼슬을 상징하는 옥관자(玉貫子)를 걸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주필암 주변에는 거북모양의 바위와 너른 바위가 있어 지금도 이곳 계곡은 남한산성의 쉴만한 물가가 될 것 같아 힐링코스로 개방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오피니언타임스=김정인]

 김정인

  서경풍수지리학회장

  서경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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