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벨기에의 거장 다르덴 형제의 영화 <언노운 걸>의 주 무대는 빈민가에 있는 작은 클리닉이다. 병원이라고 해야 서너 평짜리 환자 대기실과 계단을 내려가야 있는 진료실이 전부다. 간호사도 없이 젊은 여의사 제니(아델 하에넬)는 하루 종일 환자들을 돌본다. 그들 대부분은 노인들이거나,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이혼녀, 아니면 노동자들이다. 불법체류자도 있다.

제니는 클리닉에서만 환자를 치료하지 않는다. 병원이 바로 코앞이지만, 그나마 걸어서 올수 없는 노인들이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어오면 달려간다. 그렇다고 진료비가 비싼 것도 아니다. 물론 영화는 늦은 시간에 클리닉을 찾은 한 흑인 소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은 여의사가 다음날 소녀가 시체로 발견되자 죄책감에 죽음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이야기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작은 클리닉의 존재와 그녀의 진료모습이다.

제니는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정성껏 치료했고, 퇴근 후라도 휴대폰이 울리면 왕진가방을 들고 나섰다. 불평도, 귀찮은 표정도 없다. 당뇨로 발에 상처가 난 환자를 대신해 복지국에 전화해 복지카드 충전도 해주고, 불법체류자인줄 알면서도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친 환자를 치료해주고는 큰 병원으로 가길 간곡히 권한다. 그녀의 따뜻한 치유의 손길을 잊지 못하는 소년은 친구와 함께 ‘우리 동네 의사선생님’이란 곡을 직접 만들어 부르는 깜짝 이벤트까지 벌인다.

영화 ‘언노운 걸’ 스틸컷. ©네이버영화

영화 <언노운 걸>의 클리닉과 여의사처럼

그것이 영화라고 의도된 연출로 보이지 않는다. <언노운 걸>의 클리닉의 풍경도, 젊은 여의사의 일상생활이 되다시피 한 진료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자연스럽다. 큰 의료센터로 갈수 있는 기회까지 버리고 가난한 동네 의사로 남아 외롭고 아픈 사람들의 친구, 이웃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부럽다.

우리 사회 역시 곳곳에서 고령화와 빈곤과 소외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고, 거동조차 불가능한 노인들이 있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불법체류노동자들도 있으니까.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시설이야 좋지만 멀고, 복잡하고, 냉랭한 대형병원이나 종합병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의사가 아니다. 문만 열면 갈 수 있는 동네 작은 병원, 집안 사정에 평소 건강상태까지 훤히 알고 있으며, 전화만하면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가족과 친구 같은 의사이다.

물론 우리도 곳곳에 보건소도 있고, 방문 간호사도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 늙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의사와 병원은 여전히 멀고 힘들다. 영화의 마지막에 제니가 클리닉 대기실로 직접 와서는 팔순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의 가방을 들어주면서 부축해 진료실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래서 더욱 부럽고, 오래 남는다.

<언노운 걸>의 클리닉과 여의사는 우리에게 일상 속에서 무심히 잊고 지나가거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우리도 있다고, 같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픽사베이

교회는 영혼의 ‘작은 쉼터’가 되어야

교회도 마찬가지다. 한때 도시 어디를 가도 밤에 붉은 빛으로 빛나는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가난한 산동네일수록 더욱 극성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옛 풍경이 되어가고 있다. 갈수록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작은 개척교회들이 사라졌다. 마치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골목의 작은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듯이.

작은 교회를 운영하다 그만 둔 어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교회는 사람이 아닌 물질에 축복을 내려 결국 돈을 많이 낼 수 있는 부자들만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고. 작은 교회보다는 대형교회의 주님의 축복이 더 좋고 강하다고 착각하는 양극화를 만들었다고.

지난 1일 가톨릭언론인협의회 50주년 기념으로 열린 ‘2017 대한민국의 정의와 화해를 위한 종교의 역할’이란 주제의 포럼에서 한국기독교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남재영 목사도 대형마트처럼 자본논리에 빠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한 한국교회를 뼈아프게 질타했다. “교회가 자본의 종아리를 내리치고, 자본에 내몰린 이들이 눈물 흘리는 자리에서 함께 비를 맞으며 그들의 편에 서있어야 한다”고.

작은 교회의 몰락은 동네의 작은 ‘영혼의 쉼터’들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굳이 큰 교회에 가지 않아도 이웃집처럼, 노인정처럼 언제든 쉴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으며, 대화와 나눔을 행할 수 있는 작은 교회야말로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삶에 지친 사람들, 늙고 외로운 사람들이 위로받고 쉴 곳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하는 교회란 이런 곳이 아닌가. 겉모습이 조금 초라하면 어떤가. 좁고 낮으면 어떤가. 가난하면 어떤가. 그곳에 사랑이 있고, 평화가 있고, 진솔한 묵상과 기도가 있고, 이웃에 대한 배려와 나눔이 있고, 일상의 고민과 아픔까지 치유하는 ‘힐링’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아직 힘들고 배고파도 이런 교회를 원하는 소박한 목사들이 많다.

성당도 꼭 거점 중심의 일정 규모 이상일 때에만 세울 이유가 없다. 어느 신부는 앞으로는 고령화, 개인화로 주일에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소규모 공동체 중심의 작은 공간(공소)을 동네 곳곳에 마련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신부를 불러 몇 명이든 미사를 드리는 생활신앙, 생활종교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픽사베이

고령화, 개인화가 가져온 변화

사회가 고령화, 개인화, 파편화 될수록 작은 것들이 더 소중하다. 대도시 인구밀집 지역은 그나마 덜하지만 농촌지역은 대형화에 오히려 불편하다. 일본은 이미 모든 것이 작아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역주행을 하고 있다. 기업도 대기업, 마트도 대형마트, 병원도 종합병원, 극장도 대형멀티플렉스다.

물론 큰 것이 가진 장점들이 있다. 그러나 작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제각각 숨 쉴 때, 세상은 더 편안하고 삶은 더 여유로워진다. 차를 타고 가서 사람들로 북적대는 큰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는 것도 재미있지만, 늘 가던 동네 작은 식당에서 주인이 해주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인생의 즐거움이다. 영화에만 나오는 풍경이 아니다. 일본에는 실제로 그런 식당과 사람들이 시골은 물론이고 도쿄나 오사카에도 동네마다 즐비하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작은 것’이 더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동네 곳곳의 작은 우체국, 작은 산책로와 공원,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작은 카페. 그러나 여전히 ‘있는 쪽’을 향하고 있다. 작은 것은 작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가난하고, 외롭고, 아프고, 늙고 병든 사람들을 소중히 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는 물론 사회구성원 모두가 작은 것을 소중히 하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몇 년 만에 찾아가도 그 모습 그대로, 그 손님 그대로인 도쿄 변두리 한 작은 식당과 자기 먹을 음식 만들 듯 요리를 해서 파는 할머니처럼. <언노운 걸>의 클리닉과 여의사 제니처럼.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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