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따듯한생각]

나이가 들어 잠이 든 채로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한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의 장례식장 구석자리에서 사람들은 “호상(好喪)”이라고 떠들어댔다. 호상의 사전적 의미는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이다. 그러나 장례식장내 사람들이 말한 호상의 의미는 일종의 좋은 죽음이었다. 좋은 죽음이라니, 너무나 이질적인 말이었다. 세상에 잊혀져도 좋은 죽음은 없다. 한 사람이 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닌 일이고, 그러한 사람이 떠나는 것 또한 뜻깊어야 한다. 함께 한 기억과 추억들은 결코 무게를 잴 수 없으니 말이다.

지난 몇 년간을 통틀어 우리에게 가장 큰 상실감, 상처를 주고 깊은 애도를 표하게 한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다. 제주도로 가던 배가 갑작스럽게 침몰한 일. 치열한 삶속 불가항력적인 사건과 사고들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물론 모두들 그 삶에 쉽게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날의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 라는 생각은 계속되었다.

작가 김연수의 단편소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일을 담담히 풀어낸다. 조금 먼 시선에서 감정을 자극하지 않고 그만의 담백함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소설 속 디테일한 부분들을 돌아보면 작가가 정말 많은 생각을 했고 조심스럽게 글을 써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은 헤어진 옛 여자친구 희진의 이메일 내용을 확인한 남자 주인공이 당시의 과거를 회상하며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한국의 인디 가수였던 희진은 요쓰야의 한국문화원에 초대되어 공연하게 된다. 그녀는 앙코르곡으로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부르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희진이 공연에 오르기 전 봤던 세월호 뉴스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공연 후 뒤풀이 겸 술자리에서 만난 일본인 관계자는 그녀가 실연 때문에 눈물흘린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말은 지독히도 무례하게 느껴진다.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맥없이 쓰러지는 사람으로 희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은근한 불쾌함을 선사한다. 사람들은 희진이 음악하는 예술인이라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희진은 사고를 알리는 뉴스 속보에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슬픔을 온전히,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이다. 사랑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방식으로 사랑했던 간에 그 대상을 완전히 상실해버릴 때의 아픔은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사랑의 아픔을 겪은 희진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눈물 흘린 것인지 모른다.

김연수는 이런 감정들을 세심하고 가볍지 않게 소설로 풀어냈다. 그래서 책을 덮은 후 한동안 진한 여운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반면 어떤 기업은 세월호를 마케팅에 활용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기업은 이미 떠나간 아이들의 마음을 유추해서 기성시인들에게 아이들을 대변하듯 시를 쓰게 했다. 이를 통해 세월호를 추모하고 관심을 부를 의도였겠지만, 그것은 아이들이 쓴 것도, 아이들의 마음이 정확하게 담긴 것도 아니었으며 진정한 이해가 아닌 일종의 기만으로 비춰졌다. 차라리 소설 속 희진의 눈물이 더 진실된 위로라고 느껴진다.

©픽사베이

사람들은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할 때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며 말을 아낀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입안에 모래가 든 것처럼 껄끄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이 최선의 위로가 될 수는 없다. ‘시간이 치유해줄 것’이라며 망각의 힘을 믿고 의지해서도 안 된다. 상실에 맞서는 가장 좋은 자세는 그 대상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소설 속 희진처럼 말이다.

세월호 학생들이 나와 같은 나이라서, 빛나지 못한 아이들이 눈에 밟히는 지도 모른다. 가끔씩 나의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인지할 때면 솔직히 서글프다. 고3 입시를 앞두고 수많은 백일장에 참가했다.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백일장의 주제로 ‘세월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나는 그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수없이 출제자를 원망했다. 그것은 희생자들을 기만하는 행동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도 함부로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주제다. 단시간 안에 글쓰기 실력을 겨루는 백일장에서 담아낼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상실을 겪거나 애도의 말을 전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 사소한 상실들을 마음속에 쌓아둬서는 안 된다. 마음을 구덩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자잘한 것들이 바닥부터 겹겹이 쌓여 언젠가 부패하고 썩은 내가 진동하게 된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터져 버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큰 상실과 마주했을 때 뿌리가 흔들리고 갈피를 못 잡는 가운데 구덩이마저 자리가 남지 않아 긴 시간 방황할지도 모른다. 진정한 상실과 애도에 대해 다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큰 계단을 온힘을 다해 올라서야 한다. 그래야 더 진실되게 다가갈 수 있다. [오피니언타임스=김연수]

김연수

제 그림자의 키가 작았던 날들을 기억하려 글을 씁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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