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유명한 시작품들이 노래로 만들어진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로 읽을 때와 악곡이 붙은 상태에서 노래로 부를 때의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낭송으로 문맥을 음미하면서 읊조릴 때의 느낌과 악곡에 의탁해서 소절을 따라 부를 때의 느낌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노래로 바뀐 시는 악곡 자체에 익숙해져서 가사의 원래 고유성이 다소 희석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악곡이 붙어서 시의 원문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니 시와 악곡은 서로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 상호배합을 이루고 작용을 하느냐에 따라 그 반응효과는 현저히 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시조시인 이은상(李殷相, 1903~1982) 작시의 ‘가고파’(김동환 작곡)는 이제 악곡에 먼저 익숙합니다. 그 작품을 시낭송으로 읽어 내려가면 어딘지 싱거운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의 시 ‘산 너머 남촌에는’(김동현 작곡)과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의 시 ‘엄마야 누나야’(안성현 작곡)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워낙 유명한 노래가 되어서 악곡에 먼저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시가 노래로 바뀐 유명한 곡들은 낭송에서 일단 부적합한 것으로 인식이 됩니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경우는 대중들이 아직 악곡의 보편성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낭송효과의 신선함은 살아있습니다. 이를 보면 시와 악곡은 서로 간섭하기도 하면서 때로는 절묘한 조화와 통합을 이루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변규백 작곡, 안치환 노래)를 노래로 만들었던 작곡가는 다소 긴 분량에 곡을 붙이기 위해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곡조를 부드럽게 이끌기 위해 원작시의 음절을 다소 가감해서 조정한 대목들이 보입니다. 이 노래가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이 되어 제창(齊唱)으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것은 1980년대입니다. 민주화운동 항쟁사가 격정적으로 펼쳐지던 시기를 배경으로 이 노래는 다른 민중가요와 함께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걸어만 간다

이 서두는 이제 대중들에게 친숙한 곡조가 되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다수의 민중가요가 시위현장에서 불렸지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만큼 장중하고 경건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노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안치환(1965~ )은 무대 위에서 이 노래를 격정적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2006년에 발표된 그의 독집 앨범 ‘Beyond Nostalgia’에 수록된 이 곡을 부를 때 안치환의 창법과 톤은 거의 절규로 목이 멥니다. 함께 부르던 대중들도 눈가에 슬그머니 이슬이 맺힙니다. 나라 잃은 시절의 서러움과 분노를 기막힌 정서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란 마무리 대목에서는 가슴 속이 사무치고 무언가 비장한 결의를 스스로 다지게 만드는 힘이 불끈 작용하는 듯합니다.

대구 두류공원에 세워진 이상화 시인의 동상과 시비 ©이동순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은 이 시작품을 가르치면서 창작의 무대와 배경이 대구의 수성못 부근 들판이라고 잔잔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선생님 말씀을 그대로 가슴에 새기면서 실제로 수성들판 일대를 다녀올 기회가 있을 때면 이곳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작품이 산출된 거룩한 장소라는 생각을 하면서 논과 밭 사이를 터벅터벅 걸었습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수성들판 일대는 온통 보리밭으로 출렁였습니다. 하지만 국어선생님은 자신도 어떤 구체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다만 전해오던 이야기만으로 제자들에게 들려준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이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수성들판 일대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의 상가 및 주택단지로 바뀌었습니다. 푸르던 논밭은 모두 사라지고 급격한 도시화의 열풍에 휘말려 초록빛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대학시절 일상적 삶이 갑갑하고 무언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찾아가서 일부러 걷던 수성들판은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된 이래로 대구의 도시개발은 과거 중앙로 중심의 구도심을 현저히 벗어나서 들판이 넓은 범어동, 두산동, 수성동 일대로 뻗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범어 로타리 부근은 아직 비포장 상태로 경산을 향해 달려가던 시외버스가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느릿느릿 달려가던 신작로 길이었습니다. 이후 동대구역이 신설되어 수성못에서 동대구역 방향으로 광대한 도로가 설치되면서 이곳 일대는 대구의 신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이러한 도시팽창 분위기에 힘입어 대구 수성구는 대구의 여러 지역구보다 한층 급속한 발전과 성장으로 변모해갔습니다. 1990년대부터 이상화 시인이 걸었다는 수성들판 일대를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상화 시인의 시정신과 문학세계를 높이 기리는 문화행사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주로 세미나, 시낭송대회, 문학의 밤 따위의 행사들로 펼쳐졌습니다. 상화 시인의 작품을 새긴 시비도 수성못 부근에 세웠습니다. 이런 행사들이 햇수를 더해가면서 상화 시인의 민족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창작무대는 두산동 일대의 수성들판이었다는 사실로 완전히 굳어져갔습니다.

그런데 최근 아주 놀라운 자료가 하나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은 상화 시인의 아우 이상백(李相佰, 1904~1966) 박사가 발표한 칼럼 ‘꿈같이 희미한 기억’(동아일보, 1962.3.11.)이란 짧은 글입니다. 회고조로 쓴 그 작은 산문에서 이상백은 ‘사중(舍仲)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는 아직 앞산 밑이 일면 청정한 보리밭일 때의 실감(實感)이다’라는 대목을 남겼습니다. ‘사중(舍仲)’이란 말은 ‘나의 형’이란 말로 가형(家兄)이란 말과 같습니다. 형보다 세 살 아래인 이상백은 형을 포함하여 대구지역 비슷한 또래 청년들과 함께 어울려 ’거화(炬火)‘라는 이름의 시동인지를 발간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문학에 심취한 소년들이었습니다. 이상화, 이상백, 백기만(白基萬, 1902~1967), 이장희(李章熙, 1900~1929) 등등 당시 대구의 여러 문청(文靑) 기질의 소유자들이 함께 어울려 시를 토론하고 창작의 열정을 펼쳤던 것이지요.

동아일보에 보도된 이상화 시인의 아우 이상백 박사의 칼럼 ©이동순

상화, 상백 형제간의 우애는 마치 다정한 친구와도 같았다고 합니다. 상백은 평소 형에게 그의 창작세계와 여러 배경에 대하여 소상히 듣고 많은 사실과 일화들을 환히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상화의 조부 이동진(李東珍) 선생은 민간사립학교에 해당하는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열어서 지역의 청년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이 교육기관은 남녀의 구분과 신분의 고하를 가리자 않고 학생들을 받았다고 합니다. 주로 한학 중심이었고, 또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신식학문도 가르쳤다고 하니 놀라운 일입니다. 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큰아버지 소남 이일우(李一雨, 1876~1936)가 우현서루의 경영을 이어받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아버지를 어려서 잃었던 상화 형제들은 백부가 훈장으로 계신 우현서루에서 동양의 고전과 인문학적 교양을 학습했습니다.

상화 시인의 형제들은 아들만 넷입니다. 맨 맏형이 상정(相定, 1896~1947), 둘째가 상화, 셋째가 상백, 넷째가 상오(相旿, 1905~1969)입니다. 이상정은 민족의식이 남달랐고, 회화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만주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민족지사로 대구의 근대미술사를 개척한 초창기 인물로서의 숨은 공로가 확인이 됩니다. 화가와 독립투사 이미지는 서로 배합이 잘 되지 아니하는 듯합니다. 상화 시인의 아우 상백은 일본유학으로 사회철학을 공부했고,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형들의 영향 속에서 그의 경우도 민족의식이 강했습니다. 막내 상오 역시 일본유학을 다녀왔고, 취미가 특별하여 수렵가(狩獵家)로 활동하면서 각종 문필활동에 종사했습니다. 특이한 이력을 지닌 분이었지요. 상정 장군의 부인, 즉 상화의 형수는 평양 출신의 권기옥(權基玉, 1903~1988)으로 한국의 첫 여성비행사로 기록이 됩니다. 집안의 분위기나 범절이 남다른 반가(班家)의 소생입니다.

이상화 시인(좌)과 시인의형 이상정 장군(우), 형수 권기옥(중앙) ©국가보훈처

상화 시인의 아우 상백이 형을 회고한 글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란 시의 창작은 ’대구 앞산 밑 보리밭이 아직 청청하던 시절의 실감’이라고 증언하는 대목은 단지 놀라움이란 느낌을 떠나 가히 충격적이라 하겠습니다. 아우의 이 회고 대목은 종래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획기적 증언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고교시절 국어선생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나 ‘상화문학제’를 해마다 개최하는 수성구청의 인식은 모두 구전(口傳) 이야기에 바탕한 부정확한 것이었지요. 아무런 구체적 역사적 증거가 없이 단지 심증만으로 수성들판을 불쑥 창작무대였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아우 이상백 선생의 회고와 증언은 매우 정확한 사실에 기초한 실제적 기록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빼앗긴 들’의 위치와 의미, 공간성 등에 대해서 다시금 곰곰이 따지고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구 시민들은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이지만 수성못 들안길 일대는 대구의 구도심에서 약 6km 가량 떨어진 주변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구의 성내 주민이었던 상화가 자주 산책삼아 다녀오던 장소로 이곳은 부적절한 곳입니다. 일부러 큰 결심을 해야만 다녀올 수 있는 원거리라 시인의 빈번한 산책 코스로 다녀올 수는 없었지요. 오히려 상화 본가에서 손쉽게 다녀올 수 있었던 곳은 상백의 증언대로 대구 앞산 밑 대명동 일대가 가장 정확한 장소입니다. 대구 앞산 밑은 현재 대구시 남구 관할로 상화 시인이 산책을 다닌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대명동 미군비행장이 있는 일대입니다. 자동차로 앞산순환도로를 접어들어 월배 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미군들이 사용하던 경비행기 활주로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그곳이 보안지역이란 이유로 난데없이 교량을 만들고 인공터널처럼 가리개를 둘러쳐서 그쪽 방향을 볼 수 없도록 헀습니다.

그 미군비행장의 역사적 배경과 조성경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봅니다. 그곳은 식민지시절이었던 1920년대 중반 일본군비행장으로 활용되던 곳입니다. 보리밭이 있던 넓은 들판이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토지를 강제로 수탈당하고, 일본의 공군비행장 활주로로 편입이 된 것이지요. 상화 시인이 고향 대구에 돌아와 머물던 시절 그가 즐겨 찾던 대구 앞산 밑 보리밭은 이렇게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아름답던 국토는 마구 파헤쳐져 훼손되었던 것입니다. 일제는 각종 건설토목장비를 들여와 푸른 보리밭을 마구 둘러엎고 아스팔트로 뒤덮어 활주로를 건설했습니다. 시인이 즐겨 산책 다니던 보리밭 길은 일본군 비행장이 된 것입니다. 상화 시인은 당시 활주로 공사현장 부근 철조망 울타리 밖에 우두커니 서서 그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시인은 한 사람의 깨달은 문학지식인으로서 얼마나 가슴 아프고 따가운 내면적 고뇌와 직면했을까요? 상화 시인은 이렇게 자신의 ‘들’, 민족의 ‘들’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여기서 ‘들’은 고국, 고토(故土), 고향 등 민족적 본체성이 온전히 갈무리된 주체적 터전과 공간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체험 속에서 이룩한 작품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였습니다.

©픽사베이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

상화 시인은 이렇게 완성된 시작품을 1926년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 70호에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창작과정의 추론은 매우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상상과 자료에 근거하여 의미의 확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일본어로 ‘민간인 접근금지’, 혹은 ‘불법침입(不法侵入, ふほうしんにゅう) 금지(禁止, きんし)’라는 경고팻말이 세워져 있던 앞산 밑 일본군비행장은 광복 이후 미군비행장으로 바뀌고, 경고 문구는 ‘NO TRESPASSING’, 혹은 ‘If you ignore this warning, we may fire without notification.(경고를 무시할 경우 발포할 수 있습니다)’ 따위의 영어로 바뀌어졌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이러한 변모과정은 마치 과거 서울 용산의 일본군사령부 자리가 주한미군기지로 바뀌었다가 나중에 한국군 군사시설로 이관된 것과 경로가 흡사합니다.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이 남긴 전체 시작품은 도합 60여 편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민족문학사에서 상화의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이미 영원불멸이요, 고전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같은 대구 출신 고월 이장희, 안동 출신 이육사의 경우와도 견줄 수 있습니다. 남긴 작품 수는 비록 많지 않지만 작품과 시정신의 완성도, 민족문학사 발전에 기여한 활동부피를 헤아릴 때 작품의 분량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상화 시인의 초기 시세계는 1920년대 시창작풍토의 일반적 흐름이었던 몽상적, 퇴폐적 성향에 휩쓸려 뚜렷한 방향성을 찾지 못했습니다. 모든 창작인들의 경로와 과정이 그러하듯 상화의 경우도 소년시절에는 한 사람의 감상주의적(感傷主義的) 취향에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낭만적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지요. 게다가 상화는 부잣집 귀동이 기질마저 있었던 것입니다. 삶에서 아쉬움이라곤 모르고,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에 대하여 별반 관심을 갖지 않는 개인주의적 성정마저 지녔습니다. 하지만 소년 이상화는 차츰 현실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을 갖게 되는 각성의 계기와 대면하게 됩니다.

한 시인에게 있어서 내면적 갈등과 소극성을 극복해가는 과정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년시절 극도의 탐구심과 열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침내 대구에서 금강산까지 다녀온 무전취식의 결행 체험, 3.1독립만세시위운동을 직접 몸으로 겪은 일, 1920년대 문단에서 새롭게 발흥하기 시작한 신경향파 문학의 경험, 김약산(金若山, 1898~1958)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던 의열단(義烈團)과 관련된 경험, 일본에서의 관동대지진 과정에서 한국인학살을 생생히 지켜본 체험,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경하고 흠모하는 형 상정으로부터의 감화와 영향이 크고 막중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용광로의 정련과정을 겪은 다음 이상화 시인의 시정신은 이후 치열한 내면적 갈등과 뜨거운 극복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런 험난한 역정을 거친 끝에 비로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빛나는 시정신 도달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광복 이후 분단된 국토에서 모든 것이 둘로 갈라지던 험악한 시기에서 문학사도 남북한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서술의 관점이나 방식 자체가 양쪽은 판연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상화의 시작품은 김소월(金素月, 1902~1934)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 전체에게 놀라운 사랑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문학사를 통틀어 이런 문학인은 극소수입니다. 그러나 상화의 시를 평가하는 방법이나 분위기는 남과 북이 사뭇 달랐지요.

남쪽은 ‘나의 침실로’ 계열의 감상적 낭만주의 계열을 특히 선호하였음에 비해 북쪽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비롯한 현실주의 계열 시작품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상화문학 연구풍토에서 한국의 경우는 오로지 로맨티시즘의 꽃‘이란 관점에서 ‘나의 침실로’를 비롯한 몽롱한 감상주의 취향의 작품을 선호했습니다. 그만큼 현실주의 계열은 별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는 주권을 강탈당한 제국주의 침탈기에 인민을 위한 예술적 신념으로 인민을 위한 작품에 몰두하여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다고 평가합니다. 북쪽에서는 남한과 반대로 감상적 낭만주의 계열의 시작품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상화문학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남북한은 이처럼 현격한 차이를 보였지만 아무튼 상화의 문학은 남북한 문학사에서 함께 높은 평가를 받는 극소수의 시인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분단의 대파란(大波蘭)과 전혀 무관한 몇 안 되는 특별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문학사에서도 새로운 관점의 변화와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 4.19민주혁명 이래로 현실과 사회, 역사라는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갖게 되면서 문학의 현실의식, 역사인식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이상화 시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에도 신선한 변화의 기류가 형성되었습니다. ‘이상화시전집’이 출간되고, 상화문학을 테마로 학술토론회가 개최되었으며, 시문학전공자들에게 상화의 시세계가 새롭게 조명 받게 된 것입니다. 상화 시인을 배출한 대구에서도 두류공원의 시민광장에 상화의 동상과 시비를 세우고, 시인이 살던 고택(古宅)을 대구시에서 매입하고 이를 복원하는 등 상화 시인을 재조명하는 여러 활동들이 잇따랐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과 사업들은 일단 지역사의 재조명과 역사바로세우기란 취지에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다시 재검토해야 할 부분은 바로 상화의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창작배경에 대한 장소성을 그동안 제대로 고증했었던가에 대한 문제의 제기입니다. 대구시와 수성구에서는 ‘빼앗긴 들’의 정확한 장소성에 대해서 고증을 위한 노력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된 확인과 탐색, 고증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상화 시인의 무덤 ©이동순

세상에는 바르지 않거나 부정확한 사실을 앞세워 이익을 도모하고, 그 상태로 아무런 반성을 갖지 않은 채 일정한 세월을 경과하게 되면 그것이 마치 진실인 듯 그 나름대로의 왜곡된 정당성과 권위마저 얻게 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부정(不正)이 정(正)의 자리에서 번듯이 행세를 하고, 비리가 오히려 정의를 몰아내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꼴이 우리 주변에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 삶이 근원적으로 진보하고 정의롭게 바뀌며 발전한다는 것은 각종 비리를 과감하게 몰아내고 신속하게 정의를 회복하는 그 성취의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은 항시 중요한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제기하려는 문제의 핵심은 바로 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창작배경이 된 곳은 수성못과 두산동 일대가 아니라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가르마 같던 논길’이 있던 남구 대명동 일대입니다. 그렇게 시급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것은 진실이 우리에게 준엄하게 요청하는 매우 확고한 지시이며 수정명령입니다. 잘못된 사실은 신속히 고쳐야 합니다. 그동안 수성구가 일관되게 인식하고 실행해온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이 수성들판이라는 것은 완전한 조작이요 왜곡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수성구청의 판단과 결정은 아무런 구체적 사료나 물증이 없이 다만 심증에 기초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민족문화의 보배로운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확실한 창작배경이 밝혀졌으니 당시 보리밭이 있었던 장소, 즉 대구 남구 앞산 밑, 미군비행장 일대의 적절한 곳에 정식으로 그간의 사연과 내력, 곡절과 배경을 기록한 시비(詩碑)를 건립해야 마땅합니다.

시인의 고향 대구광역시에서는 2005년부터 대구 수성구청이 주관하는 상화문학제(相和文學祭)를 시작해서 금년으로 열두 해째를 맞고 있습니다. 수성구의 수성문화원이 이 행사를 주관해온 까닭은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을 수성구 들안길 일대(옛 수성 들판)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화문학제에서는 시인의 이름을 걸고 세미나, 백일장, 문학의 밤, 유적답사, 시낭송대회 등 여러 행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진행되었던 다양한 행사를 비판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화의 문학정신과 그 유산은 전체 대구시민과 한국인 모두의 공동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화축제가 대구 수성구의 전유물로 운영되고 독점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자 합니다. 이제 ’빼앗긴 들‘의 창작배경과 모티브가 명쾌하게 밝혀졌으므로 전체 대구시민과 문학인, 언론사 등 여러 유관기관이 합심 단결하여 상화의 문학정신을 되새기고 현양하는 일에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실천적 노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점이라 하겠습니다.

대구가 배출한 민족시인 이상화는 그가 자주 찾던 산책코스 대구의 남구 대명동 앞산 밑 보리밭이 일제에 의해 군용비행장으로 파헤쳐지는 광경을 보며 그 충격 속에서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작품이 발표된 이후 ‘빼앗긴 들’의 의미는 대구라는 특정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한국인이 살아가는 국토 전체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갑니다. 그 과정은 제국주의 침탈과 유린 속에서 한 편의 시가 이룩한 ‘비극적 황홀’의 눈부신 세계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당당한 민족시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급기야 영원토록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는 고전(古典)으로 등극하게 된 것입니다.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문학평론가 

  계명문화대 특임교수  

  영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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