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범의 동서남북]

국가 간 협상을 하거나 외교 마찰이 생길 때 언론은 자국의 관점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내셔널리즘 같은 거창한 단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자기 나라와 자국민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가 미국 워싱턴DC의 세미나에서 한 발언을 놓고 벌인 국내 보수 언론들의 보도 행태를 보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서글프다 못해 분노 같은 게 솟아오른다. 과연 어느 나라 언론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발언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동아시아 재단과 우드로 윌슨 센터 주관 세미나에서 나왔다. 문 특보 발언은 간단명료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를 포함한 한·미 연합 군사훈련 규모 축소를 미국과 논의할 수 있다.”

어법상 가정법에 해당하는 문장이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활동을 중단하거나 동결한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우리는 한·미 군사훈련 축소 문제를 미 측과 논의할 수 있다’는 구조로 돼 있다. 만약 북한이 이러이러한 조건을 충족시켜 준다면 한·미도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 군사훈련 축소문제를 논의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축소하겠다’는 단정적 표현이 아니라 ‘축소 여부를 논의할 수 있다’는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유보적인 표현을 구사한 것이다. 그는 한미연합 군사훈련 축소 문제와 관련,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이후 전개된 미군 전략무기를 그 이전 수준으로 돌리자는 뜻’이며 ‘북한의 비핵화 목표에 도달시키기 위해 한·미가 한 발씩 물러나는 식으로 협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진보지향의 미디어를 제외한 대다수 매체들은 문 특보의 발언이 부적절했다고 입을 모았다. 보수 언론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문 특보의 발언으로 ‘워싱턴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느니, ‘트럼프 대통령이 몹시 진노했다’느니 하며 온통 미국의 입장 살피기에 몰두한 모습이었다.

어디 그 뿐인가. 일부 언론은 한 술 더 떠서 문 특보의 발언이 “그렇지 않아도 미국 조야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한미동맹의 신뢰관계에 대한 회의론을 더욱 부채질 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이는 한반도 안보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동맹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마치 미국에게 큰 불경죄(不敬罪)라도 지었다는 듯 엄중하게 책임추궁을 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문 특보는 “협상이란 본래 주고받는 것이고, 나는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언하는 사람”이라며 특보로서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 그는 세미나 후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한미동맹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건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히고 “사드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한미동맹이 깨진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고 반문했다.

©픽사베이

문정인 특보와 함께 미국을 다녀온 정의당의 김종대 의원은 문 특보의 발언에 3가지 전제가 있음을 강조했다. ▲북한의 핵 동결이 선행되어야 하고 ▲미국과 사전 협의하며 ▲문 특보 개인의 의견일 뿐 정부의 입장은 아니고, 훈련 중단이 아닌 축소를 논의할 수 있다는 수준이라는 설명이다.

김 의원이 전하는 미국 현지의 분위기도 국내 언론의 호들갑과는 전혀 다르다. 어느 면에서 보면 국내 언론의 우려와 대조적이기까지 하다. (6.23일 ‘프레시안’ 인터뷰)

그는 “만약 워싱턴에서 설문조사로 ‘한미정상회담이 파국으로 간다면 누구 때문일 것 같으냐’고 물어본다면 ‘트럼프’라는 대답이 과반을 차지할 것”이라고 그곳의 분위기를 전했다. 김 의원은 또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동맹을 깨자고 말하는 미국인들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뉴욕타임즈도 ‘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 제목의 사설(6.12일)에서 ‘사드 배치 논란과 관련해 미국정부가 한국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고,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문 특보의 발언이 처음부터 개인의 생각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 의원에 따르면 2015년 북한이 이미 핵 동결과 한미연합 군사훈련 축소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고, 작년 9월 미국 외교협회(CFR) 보고서에도 이런 해법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문 특보는 바로 이것을 보고 협상할만하다고 판단, 이를 약간 변형시켜 언급했던 것이라는 설명이다.

김 의원은 문 특보의 발언이 마치 국가 안보를 허물어뜨린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국내 보수 언론들에게 “미국 외교협회가 그런 얘기할 때는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워싱턴은 지금 대북 접근과 관련해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어 한국 대통령이 어떤 제안을 하는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양국간 협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평화통일시민행동’이 추진하고 있는 ‘평화통일시민강좌’에서 “일본은 미국에 ‘NO’라고 말하면서 커 갔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미 60~70년대 초 지식인들 사이에 ‘우리도 미국에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을 조금 풀어주면서 안보관계를 완전히 상하·종속관계로 만들려 하자 일본 언론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미국이 일본에 이러면 안 된다. 우리가 패전국이지만 너무하지 않나. 우리가 종이냐고 했다.
외무성 관리들이 미국과 협상할 때 이것은 큰 힘이 되었다. 그 후 일본은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잘 협조하면서 경제·군사적으로 G3에 들어갔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국민적 분위기가 일본을 저렇게 강국으로 만든 것이다.”

한국의 보수 언론이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니까 일본 언론은 벌써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지 30년 이내에 거대 미국에 당당히 ‘아니오’를 말할 수 있었고, 그 바탕 위에 일본의 자주성을 세울 수가 있었다. 미국에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외교가 주권국가로서의 위상을 지켜 준 것이다.

©픽사베이

어느 나라가 됐건 정상회담을 앞두고 언론이 양국의 주장을 사전에 비교해서 알려주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문 특보의 워싱턴 발언이 (비록 본인은 사견이라고 강조했지만) 정상회담을 앞둔 대통령의 특보 자격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그것을 왜 문제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도 미국의 언론이 아니라 국내 언론이니 말이다. 한미 공히 새로 출범한 정권의 최고 지도자들이 처음 만나는데 어찌 견해차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서로 이견을 드러내 놓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협상의 노하우이고 외교의 진수가 아닐까.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일부 보수언론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과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무사히 회담을 잘 치러낼지 걱정이라고 말한다. 야생마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미국의 요구를 잘 받들어 첫 번째 정상회담을 무사히 잘 마치고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오히려 한국의 여론을 정확히 알고자 한다. 그 바탕 위에서만 비로소 만족스런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피니언타임스=김준범] 

 김준범

 (주)대한공론 상임 고문

 전 국방부 국방홍보원 원장

 전 중앙일보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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