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한 달 전쯤, 진돗개 한 마리를 입양(마음에 들지 않지만, 모두 이렇게 말하니 할 수 없이 쓴다)했다. 태어난 지 한 달 보름 밖에 안 된 강아지다. 어릴 때, 시골에서 부모님이 키운 누렁이는 있었지만, 스스로는 난생 처음이다.

그동안 아내와 아이들이 수없이 개나 고양이를 기르자고 애원해도 완강히 거부했다. “개나 고양이를 집에 들이면 내가 집을 나가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동물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난히 동물을 싫어하거나, 알레르기가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 이유에서다. 핑계 같지만 한 번 들어온 이상 끝까지 책임지고 함께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다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파 지레 그런 일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생명체이기는 마찬가지니까.

진돗개 ‘동이’ ©이대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동물에 관심과 애정을 쏟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뜩찮아서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아프고 배고프고 외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마음이니 그들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더구나 아파트에서 사람과 동물이 함께 생활하기는 정말 싫었다.

그래서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하나는 ‘마당 있는 집’이고, 또 하나는 ‘진돗개나 삽살개’였다. 사실상 키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은퇴 후, 늙어서 귀향이나 하면 모를까 서울에서 마당 있는 집은 언감생심이고, 마당에서 키워도 되는 진돗개나 삽살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강아지를 기르면서

세상사 그 무엇도 함부로 장담할 일은 아니다. 지난해 우연히 지인이 살던 북악산 속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왔고, 그해 겨울 산책을 나갔다 보기에도 멋들어진 이웃에 사는 진돗개를 보았다. 그 모습에 취해 “이런 개라면 키우고 싶네”라고 했더니, 주인이 선뜻 “내년 봄에 강아지 한 마리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솔직히 둘 다 반신반의였다. 진돗개를 주겠다는 처음 보는 이웃의 말도, 키우겠다는 말도. 그렇게 말만 주고받은 채 겨울은 지나갔다. 그런데 지난달 정말 그 이웃이 강아지 한 마리를 가져왔다. 뱉은 말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아내와 아들이 너무 좋아해 ‘동이’라고 이름 붙인 강아지는 식구가 되었고, 연일 작은 마당이 좁다고 뛰어다닌다.

강아지 자랑이나 사랑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려견(이 말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이 있으면 좋다는 얘기를 새삼스럽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마음이 무겁다. 오로지 엄마 아빠만 쳐다보는 아이를 키우는 것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어떤 것이 ‘사랑’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방송화면 캡처 ©EBS

사랑이 아니라, 상처가 될 수 있음을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 부모만큼 헌신적으로 자식을 돌보는 존재는 없다. 그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세상에 부모만큼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도 흔치 않다. 그것을 모를 때, 부모는 자식을 불행하게 만들고, 자식은 부모를 원망한다.

그 상처는 다름 아닌 사랑이란 이름으로 저지른 강요들이다. 강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이리저리 물어보던 중에 누군가 EBS TV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를 보라고 권했다. 정말 온갖 문제를 갖고 있는 개들이 나오고, 그런 개를 ‘개통령’이란 별명을 가진 조련사 강형욱씨가 해결해 준다.

어릴 때 아버지가 강아지 공장을 해 그곳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개들을 보고 누구보다 상처를 많이 받았고, 그래서 어쩌면 지금 누구보다 강아지를 사랑하게 된 그를 만나면 그렇게 말썽을 부려 주인을 속상하게 하던 개도 달라진다. 물론 TV니까, 생략과 과장도 있을 것이다.

©픽사베이

반려의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은 조련사 강형욱의 개 주인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어떤 개든지 문제의 원인을 금방 파악하고는 바로 잡아주는 강형욱을 보고 주인은 물론 시청자들도 감탄한다. 물론 전문가다운 경험과 지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비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주인이 갖고 있지 않은 마음과 시선이 있다. 인간의 것이 아닌 지금 자신 앞에 있는 개의 마음과 시선이다. 때문에 개들의 마음을 안다. 어떤 상처가 있었기에 유난히 목줄을 싫어하는지, 마치 주인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집안 난장판으로 만드는지 안다. 그리고 상처를 쓰다듬어준다. 동물이라고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다. ‘반려견’의 반려는 동반자, 짝, 동무라는 뜻이다.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평생 함께 가는 사이라는 얘기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개라고 다를 수 없다. 만약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오고, 그렇지 않으면 학대하거나 버린다면 ‘반려’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강형욱은 동물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람도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강아지 ‘동이’를 기르면서 깨닫는다. 그리고 후회한다. 나의 자식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잘못되었는지. 그로 인해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 아들과 강아지가 자꾸만 닮아 보인다.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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