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법이 가능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려달라”고 절규하고 있다. 무참히 살해당한 인천 초등학생, 충주 인터넷 수리기사, 창원 골프연습장 주부의 유족들 모두.

초등학생 엄마는 긴 호소문을 인터넷 다음에 올렸다. “가해자들에게 보다 엄중한 처벌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탄원에 동참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인터넷기사 유족도 범인을 엄중히 처벌해 달라는 탄원서를 시민 1500명의 서명을 받아 검찰에 제출했다. 인터넷에서도 3만명 가까이가 서명에 동참했다. 창원 골프연습장에서 납치 살해된 주부의 남편도 “계획적으로 누군가를 납치·살해하는 흉악범들은 이 땅 위에 설 자리가 없도록 엄벌 받는 세상이 되기를” 원했다.

이들의 탄원과 호소와 희망에 많은 국민(네티즌)들이 공감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살인의 동기와 잔인성에 있을 것이다. 10대 소녀가 휴대폰을 잠깐 빌려 달라는 여덟 살 초등학생을 자신의 아파트로 유인해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과정은 입에 담기도 섬뜩한 엽기적 행각이었다. 공범은 또 어떤가.

인터넷 수리기사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 점검을 요청해 찾아온 기사의 서비스 태도가 맘에 안 든다고 흉기를 마구 휘둘러 죽였다. 골프연습장 살인범들은 오로지 돈을 빼앗을 목적으로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납치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부모 이야기 한마디 했다고 주저 없이 살인을 저지르고, 시신을 강에 버렸다.

인천 초등학생 살해 피해자 어머니가 인터넷에 올린 탄원 동참 호소문. ©다음 아고라

세 살인사건이 남긴 시민적 분노

범인들의 살인 동기부터가 ‘용서’의 여지가 없다. 비밀 친구와 살인 시나리오를 실행하기 위해 길 가던 어린 아이를 죽이고 신체 일부를 공범에 주었다. 단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설득을 위해 말 한마디 했다고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불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유가족과 네티즌들이 분노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살인을 저지른 이후 범인들과 그 가족이 보인 행태이다. 진심이든 아니든 그들에게 일말의 죄의식이나 후회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살인범들은 태연하게 공범에게 시신 일부를 건네주고 함께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위장과 도피를 위해 미장원 들러 시시덕거리며 머리모양을 바꾸는 그들에게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소리는 허망하다.

인천 초등학생 살인범과 구치소에서 같은 방을 쓰며 범인을 두 달 가까이 지켜봤다는 사람도 오죽했으면 “저 역시도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때려죽이고 싶었다”고까지 했을까. 그녀는 “피해자 부모에게 미안하지도 않냐”는 질문에 “나도 힘든데, 피해자 부모에게 왜 미안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가족들은 어떤가. 초등학생 살인범의 부모는 구치소에 있는 딸에게 아스퍼거 증후군 관련 서적을 보내줘 정신병자로 위장하려 했고, 공범은 돈을 무기로 내로라하는 변호사 12명을 선임했다가 여론의 화살을 맞고 3명으로 줄였다. 인터넷기사 살인범 역시 피해망상증을 호소하며 처벌을 감경 받으려 하고 있다.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10대 소녀와 공범이 아무런 반성 없이 영악하고 교묘한 술수나 부리려 하고, 부모 역시 그것을 공모하고 재력을 동원해 죄를 피하거나 가볍게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 감히 ‘용서’를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자식의 죄는 부모 탓’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픽사베이

형벌이 가벼우면

죄를 짓고도 점점 뻔뻔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직도 돈이 최고이고 돈이면 다 되는, 우리사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적폐가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 앞에서는 권력도, 법도, 정의와 양심도, 명예도, 사회적 책임도 던져버리는 세상이다.

그럴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는데 있다. 장기간 집행중단으로 사실상 사형제도가 폐지되고, 이러저런 이유를 대면 그나마 징역살이도 줄어든다. 잘만 계획하면 인천초등학생 살해범이나 충주 인터넷기사 살해범처럼 병(정신질환)을 갖다 붙여 형량을 줄이는 것은 물론 사회적 비난과 피해자 가족에 대한 죄의식까지도 털어버릴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돈과 지위를 동원한 그런 비슷한 모습을 수없이 봐왔다. 지금 수많은 시민들이 세 살인사건의 범인들에게 엄한 처벌을 바라는 것도, 희생된 초등학생의 엄마의 말처럼 ‘최소한의 사회적 경고’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희생자의 억울항 넋을 달래고, 아무런 잘못도 없이 어린 자식과 아버지와 아내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들의 피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달래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작은 허물에 가혹한 형벌을 가하면 백성들이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법을 피하려는 마음만 갖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형벌을 지나치게 가볍게 하면, 사람들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아 한비자는 나라까지 위태롭게 한다고 했다. 죄형법정주의는 그것이 공정하고, 합당하고, 죄와 벌의 저울추가 균형을 맞출 때 믿음을 얻는다. 그 믿음이 깨질 때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직접 응징과 복수를 꿈꾼다.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