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진의 소중한 사람]

[오피니언타임스=이수진] 나는 조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애는 아주 희귀한 무엇이다. 세상에 반짝하고 등장한 것이 겨우 만 사년이 넘었을 뿐이지만 벌써 얼마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는지 모른다.

식사 장면을 보자. 먼저 밥을 다 먹고 거실에서 만화영화를 보던 조카가 신비의 사이렌을 에~엥 울려대자마자 식탁에 있던 아빠가 구르듯 달려나간다. 이리저리 달래서 금방 헤헤 웃게 하는 것이 여간 재주가 아니다. 참 용한 재주로구나! 하고 들여다보는데 미식축구 파이널에서 뛰다온 것 같은 나의 남동생은 터치다운을 해낸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수저를 들며 한마디 한다. “애들이 막무가내일 경우에는 무조건 받아주면 안 돼! 혼낼 때는 혼을 내어가면서 훈육을 해야 한다고.”

마치 동생이 정말 바보가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불과 1분 전만해도 비지땀을 흘려가며 아이를 달랬다. “이유를 말해야지, 계속 울면 아빠는 들어주지 않을 거야.” 그런데 이 말은 내게 이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제발 말해줘. 아빠는 네가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릴 지도 몰라. 그렇게 울면 목이 아프지 않니? 아빠는 네가 목이 아플까봐 너무 가슴이 아프단다. 그리고 제발 말해주면 안될까. 일단 말해만 준다면 이 아빠가 무엇이든 다 들어줄게. 정말 부탁해.”

©픽사베이

동생의 변화는 가끔 날 놀라게 했다. 그는 원래 정이 많고 다정했지만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 동생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었다. 노숙자 할아버지를 보면 입고 입던 파카를 벗어 덮어드리고, 편의점에서 두유나 도시락을 사다가 손에 쥐어드려서 날 놀라게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리는 것을 좋아했다. 교실에서 친구들이 싸워도 말리고, 길을 가다가 노약자에게 시비를 거는 나쁜 사람도 말리고, 운동을 하다가 보행자용 터널에서 난폭하게 자전거를 타 할머니를 놀라게 한 아저씨도 말렸다. 심지어 달리는 자전거를 쫓아가서 앞으로 그러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는 바람에 엄마는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항상 노심초사였다.

조카는 그 모든 것을 바꾸어 주었다. 아버지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어린 것의 존재는 그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묵인하도록 해주었다. 힘은 있으나 책임질 것이 많아 오늘도 참고야 마는 진정한 아저씨의 길에 조금씩 합류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건 올케도 완전히 바꾸지 못한 천성이지만, 딸아이를 향한 마음은 정의로움보다 우선순위가 높았다. 동생은 제 딸에게 만은 중심이라는 것이 없었다. 마냥 끌려 다녔고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

동생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아이가 있는 것은 책임감이 생겨서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1절만 하면 좋았을 것을,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를 마치 제 동생 보듯 내려다보는 바람에 아주 몹시 기분이 나빠진 내가 동생 신발 안에 물티슈를 각각 5~6장씩 넣게 만들고야 말았다.

조카는 벌써부터 고모에게 원하는 걸 얻어낼 줄 알았다. 전화로 데데데데 숨도 안 쉬고 두 번 세 번 연거푸 같은 설명을 되풀이하는 장난감 이름을 나는 혹시 잊을까 두려워 노트북 한구석에 받아 적고도 모자라 여러 번 외우고 또 외웠다. 급하게 주문한 쇼핑몰에서 받아보았는지 이틀이 지나 제 아빠에게 한 전화를 중간에 낚아채서는 그 장난감을 제가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또 데데데데 설명하기 바빴다. 그 아이 목소리는 노래 같았다. 나는 조카가 놀러 와서 피자를 먹자면 피자를 먹었고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면 케이크를 먹었다. 항상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 보았다.

나는 일에 치여 항상 바빴다. 비록 그 애와 자주 그림을 그려 줄 수 없었고, 색종이로 뭔가를 접어 줄 수도 없었지만, 그래도 조카가 성장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를 바랐다. 고모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가 귀에 착착 감겨왔다. 좋은 고모가 되고 싶었다. 나의 막내고모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말이다.

©픽사베이

막내고모는 내가 유치원 가기 전부터 멋진 기억들을 많이 남겨 주었다. 그녀가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녔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특히 장난기가 심했던 그녀는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나 지하상점 매장에서 모르는 사람과 눈짓 손짓으로 사인을 주고받으며 날 놀리는 걸 즐겼다. 다른 사람에게 슬몃 내 손을 건네 잡게하고는 모르는척 딴청을 피우다, 내가 그것을 깨닫고 아주 깜짝 놀라게 되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비극의 순간을 노리곤 했다.

구경에 정신이 팔려 넋이 나가있던 내가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고모”라고 할 때, 내 손을 잡고 걷는 이름 모를 아줌마나 아저씨가 “응?” 하면서 나를 보며 씩 웃는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울먹울먹하면서 고모를 찾고, 고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박장대소를 하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던 것을 나는 두 번이나 기억하고 있다. 두 번이나! 그 시절의 고모는 즐거운 아가씨였다. 흐응~ 하면서 웃었었다.

삼촌도 고모처럼 나를 예뻐했다. 삼촌은 퇴근해서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신도 갈아 신지 않고 나를 내놓으라고 해서는 두 눈 멀뚱멀뚱한 나를 휘~익하고 무등 태워서 나갔다. 그러면 나는 아랫동네에 있는 슈퍼에 가서 과자 봉지가 들어있는 까만 봉다리를 양손에 들고 개선장군처럼 온 동네 구경을 하며 들어왔다. 물론 지금은 ‘나는 정말 엄청나게 근엄하며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근엄하고 싶다’는 표정의 삼촌을 보면서 이 추억이 정말 있었던 일일까 하고 기억을 조금 의심하게 된다.

조카의 탄생과 그 애의 성장을 지켜본다는 것은 우리 가족 구성원 개개인에게 있어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조카의 조부모 되시는 두 양반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애만큼 작던 과거에도 그 시절의 나를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어준 나의 어른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아이란 특별한 존재였다. 대가족이든, 핵가족, 싱글부모, 혹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용감하게 홀로선 모두의 아기일지라도, 그 누군가에게 있어 아이는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아이란 그런 것이다. 변화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심지어 스스로 변화를 선택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대단한 그 무엇.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하지만 때로는 그 어떤 논리라도 통할 수 있는 존재. 내게 세상 어느 것에 비할 수 없는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어느 것에 비할 수 없는 슬픔을 주는 양면성을 가진 그런 작은 생명.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화면

하지만 인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귀여운 여자아이 사랑이는 어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아이에게 사춘기는 오지 않을 것이고, 이젠 그 무엇도 설레며 기다릴 것이 없다. 가족과 친척, 친구들이 8살 어렸던 여자아이의 기억을 가지고 수십 년을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이다. 빛은 사라졌다. 절망과 깊은 상처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숨 막히는 어둠으로 내려앉았다.

육체는 훼손되었고, 살인자와 공범은 망자의 육신마저도 모욕했다. 살인자와 그 공범은 오늘도 바쁘다. 그들에게는 준비된 미래가 있는 모양이다. 후안무치들이 모여앉아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골몰하는 것을. 현재를 흥정하는 것을. 나는 오늘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덟 살 난 핏덩이를 이유 없이 잔인하게 난도질을 해놓고도 그저 살고 싶어서 눈을 굴리는 살인자 두 명의 비열함과 그들을 위해 변호사를 대거 선임하는 도리도 수치도 모르는 그 부모들. 명예와 긍지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는 변호인들. 사랑이에게 몹쓸 짓을 해놓고 자신들의 남은 인생은 이렇게 망칠 수는 없다고 변명하는 살인자와 공범에게 그러고도 사람이냐고 묻고 싶다.

사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하고 골똘하게 생각해본다. 아직 핏덩이 같은 어린 너는, 어디로 훨훨 날아갔을까? 병아리처럼 귀엽던, 환한 봄볕 같던 너는. 네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다음 세상에서는 오래오래 머물기를. 수천만년 세월이 흘러도 상처입지도 베어지지도 찢겨지지도 않는 뿌리가 아주 깊은 아름드리나무가 되어서 만나자. 어른된 자들의 서러움이야 너의 찬란한 녹음에 부끄러워 땅을 보며 차마 눈부셔할지라도, 우리는 너를 감히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너는 소중한 우리 모두의 아이. 너는 영원을 살아갈 것이다.

 이수진

 영어강사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감사합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