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사업이 끊어진 물길을 잇는 사업이었다면 지지했을 것 같다. 물론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한다는 당초의 엄청난 계획은 생각해 볼 문제였지만…. 결과적으로 팔당댐과 충주댐에 이어 이포보, 여주보, 강천보를 잇따라 건설하면서 물길은 더욱 더 완고하게 단절되고 말았다.

효율적인 물 관리는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4대강처럼 지도를 바꾸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유구한 수운(水運)의 역사는 누구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삼국시대 이후 남한강 물길의 역사에 대한 무지(無知)는 4대강 사업을 찬성하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 모두 다르지 않았다. 서글픈 일이다. 오늘은 그 물길에 담긴 이야기를 한번 따라가 보면 어떨까 싶다.

충주 창동리의 고려시대 마애여래상. 조창에서 막 출발한 조운선의 뱃사람들이 무사귀환을 빌었다. ©한국관광공사

충청북도 충주 중앙탑면 창동리의 탄금호를 내려다 보는 바위에는 고려시대 마애여래상이 있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이 불상이 물길에서 바라봐야 배례(拜禮)가 가능한 위치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창동리는 충주시내의 서쪽으로 남한강과 보은 속리산에서 발원해 괴산을 거쳐온 달천강이 막 합류한 지점이다.

1995년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남한강 물길은 완전히 가로 막혔다. 이전에도 물길이 뚫려있었다고는 해도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1928년 충주와 조치원을 잇는 충북선이 개통된 것은 수운이 기능을 잃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충주 일대의 물산은 물길이 아니라 조치원에서 경부선을 갈아타고 서울로 갔다.

고려는 왕조 초기에는 호족의 연합정권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고려를 창업한 왕건부터가 송도 호족 출신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는 성종 2년(983)에 이르러서야 지방관을 파견하고 국가가 부과하는 세금, 즉 조세를 거둘 수 있었다. 고려는 이후 전국에 모두 13개의 조창(漕倉)을 설치했다.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都城)으로 나르기 위한 창고이자 선박을 관리하는 기관이었다.

당시는 전국에 모두 13개의 조창을 두었다. 흥미로운 것은 충주 덕흥창과 원주 흥원창의 존재다. 다른 조창은 모두 해안에 있었지만, 이 두 개의 조창은 내륙의 남한강에 둔 것이다. 흥원창은 강원도 지역의 세곡을 나르는 기능을 했다. 그런데 덕흥창이 오늘날 충북 일대의 세곡은 물론 경상북도 일원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도성으로 운반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은 특기할 만 하다.

따라서 덕흥창에는 충청도과 경상도의 세곡이 한데 모였다. 덕흥창이 있던 곳이 바로 창동리다. 창동리(倉洞里)라는 땅이름부터가 조창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창동리 마애불은 조운선이 덕흥창을 막 떠나 고려의 도성인 송악, 곧 오늘날의 개성이 있는 예성강 하구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위치에 새겨졌다. 뱃사람들은 마애불을 향해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무사귀환을 염원했을 것이다.

조선은 초기 충주에 덕흥창과 함께 경원창이라는 또 하나의 조창을 운영했다. 그런데 곧 두 조창을 통폐합한 가흥창을 하류에 새로 만든다. 가흥창이 있었던 가흥리는 지금 충주에코폴리스경제자유지역을 건설하고 있을 만큼 넓찍한 지역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덕흥창과 경원창은 물론 가흥창의 흔적은 이상할 만큼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나마 목계나루에 남한강을 오가던 뱃사람들의 역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가흥리에서 목계교를 건너면 목계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원주, 오른쪽으로 가면 제천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곧바로 ‘목계나루’라고 새겨진 큼지막한 비석이 나타난다. 목계장터 거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목계나루터 비석과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 목계나루는 조선시대 충주 조창을 통폐합한 가흥창의 강 건너편에 있다. ©서동철

목계장터란 곧 충청도와 강원도의 전통시대 물산과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새로운 시대의 물산이 마주치던 장소였다. 건너편 가흥창과 함께 번성했을 목계장터는 하지만 일제강점기 철길의 개통으로 방물장수만 오가는 쓸쓸한 장터로 몰락했다. 이어 1973년 팔당댐이 완공되어 서울로 이어지는 물길이 완전히 단절되면서 그야말로 파장(罷場)이 됐다.

장터 초입에는 충주 출신 시인 신경림의 ‘목계장터’ 시비가 있어 여행자들에게 또 다른 감흥을 준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로 시작하는 이 시를 읽어본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어지는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라는 대목은 수운의 쇠퇴와 함께 몰락한 목계장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목계삼거리로 나가 원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30분 남짓 달리면 원주시 부론면이다. 중간의 충주 소태면에는 청룡사 터가 있고, 부론에 접어들면 거돈사와 법천사 터가 잇따라 나타난다. 그 아래 원주 지정면의 섬강 상류에는 흥법사 터, 여주에는 신륵사와 고달사 터가 있다. 모두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누린 거찰(巨刹)들이다.

원주 부론면 법천사 터의 지광국사 현묘탑비. 지광국사 현묘탑은 일제 강점기 반출되어 그동안 서울 경복궁 마당에 있었다. 지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수리하고 있는 현묘탑의 법천사 터 귀환 여부도 관심사다. ©서동철

원주 흥원창은 섬강이 남한강에 흘러드는 부론 흥호리에 있었다. 역시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고려시대 남한강 주변에 이렇듯 규모가 큰 절이 줄지어 들어선 것도 수운의 힘이었다. 조선 중기의 뛰어난 시인 손곡 이달이 자신이 아호로 삼은 흥원창 주변 손곡(蓀谷)에 살았던 것 역시 물길의 편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충주 일대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하게 세력다툼을 벌인 지역이기도 하다. 충주는 한강 하류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군사적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와 고구려를 잇따라 물리치고 한강 하류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먼저 충주를 세력권에 넣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한강 하류를 손에 넣으면서 당나라와 교섭 루트를 비로소 열 수 있었다. 경기도 화성의 당성이 신라의 대당(對唐) 교류 전진기지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진문화의 수입이 원활해지고 외교 및 군사적 협력을 강화한 결과는 신라의 삼국통일로 나타났다. 그러니 남한강 물길이 없었다면 신라의 삼국통일도 없었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역사의 물길이 지금은 가로막혀 있으니 안타까운 것이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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