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전송]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만약에 지금 그대에게 맥락도 기승전결도 맞지 않아도 좋으니 단 하나만 말해 보라고 한다면, 살아오는 동안 가장 절실했고 그런 만큼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했던 단 하나의 그 무엇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과 현재의 나는 어떤 관계가 되어 있는지를 가슴의 지시에 따라 설명해 보라고 한다면?

©픽사베이

그대의 머리와 심장은 어디로 달려가는가.
무엇과 어떤 시간을 소환하는가.
거기에 저 멀리서도 보이는 어떤 사람이 내 답안지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면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왜 지금 이 순간 이 말을 하고 싶은가.
이런 문제지가 주어진다면?

어쩌면 많은 단어와 상황이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뇌관과 가슴을 두드리며 쏟아질지 모른다.
단 하나만 말하라니. 많든 적든 살아온 시간이 있는데 단 하나만 앞에 세워 보라니. 출제자의 인색함을 탓하느라 앞에 쏟아놓은 수많은 감정과의 눈 맞춤도 버거울지 모른다.

그러나 당혹감은 짧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만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의 주인공은 자신이므로 그 세월을 관통하는 난공불락 속수무책의 복병 또한 없는 게 이상하다.

패전의 위기 없이, 패전의 쓰라림 없이, 시작도 우세했고 과정도 압도적 우위였으며 결말도 당연히 승리일 뿐인 삶이라면 우리는 그런 삶에 과연 얼마나 진심을 담은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부러울 순 있어도 동경과 존경과 두고두고 나를 이끌어가는 지표로서는 고개가 저어지지 않는가.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답지를 메우려고 한다. 자연스럽게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책 한 권을 가슴에서 꺼내놓을 수 있는 귀한 시간과의 조우가 시작된다.

첫 장을 펼쳐 서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유독 크게 보이며 둥둥 떠오르는 단어를 너무도 쉽게 만난다. 간혹 그것도 아주 드물게 드러내 보인 적은 있겠지만, 살아오는 내내 만 겹의 포장지에 싸고 또 싸 테이프로 수천 번을 돌려 내 몸보다 더 크게 뭉쳐진 그것이 오늘 내 앞으로 굴러온다.

외로움!
나는 답지에 ‘외로움’이라고 쓴다. 그리고 오래 그 세 음절을 바라본다. 한문처럼 표의문자(表意文字)가 아닌데도, 외로운 모든 것이 줄줄이 걸어 나올 만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과 시간에서 ‘혼자’라는 자각이 그림자처럼 나를 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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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한 번도 외로운 적이 없다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이 바쁜 세상, 이 재미있는 세상, 이 할 일 많은 세상, 거기다 부모 형제 가족 친구 등 주변에 사람이 넘치게 많은 세상 등이 그들이 외로운 적 없는 이유로 나열하는 대부분의 순서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외로움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격적으로 우울 모드를 즐기는 나약한 어떤 부류로 치부하기 일쑤다.

그런 사람들에게 부연 질문을 해 본다.
바쁘지 않고, 재미있지 않고, 할 일이 없어지고, 주변의 모든 이들이 떠나간다면 그때는 어떨 것 같은가.
속사포 같은 대답이 쾅! 하고 나온다.
“그러면 당연히 외롭겠지요. 그래서 늘 또 다른 관계망을 뚫어야죠.”

외로움의 유무를 세상과 일과 사람에게서 즉, 내 안의 숨이 아닌 내 바깥의 부산함과 관계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고 확정짓는 사람들. 그들은 오늘도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 주는’ 세상의 그물망을 더 단단하게 조이며 그 안에서의 삶에 집중한다. 세상의 구성원으로서는 빼어난 발군의 친화력과 흡입력을 가졌지만, 스스로에게는 타자인 사람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숨소리가 새벽 공기처럼 낮게 띠를 두르며 퍼지는 동공의 시간을 지나쳐간다.

이와는 반대로 외롭다는 말을 자신의 하루 숨만큼이나 달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 중 대다수가 자신의 외로움에 빠져 세상과 시간에 대한 원망, 나아가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부화하지 못한 누에고치가 되어 간다. 자신을 외롭게 하는 그 무엇을 내 바깥에서만 찾는 이상 그것은 필연적인 결말이라 할 수 있다. 오랫동안 내가 그랬었다.

나를 외롭게 하는 그 무엇을 내 바깥에서 찾는 일에 모든 능력을 동원했고 당연한 결과로 그것을 객관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외로움을 배회하는 길은 허방을 딛는 것처럼 아슬아슬해 발목은 휘청임을 막느라 안간힘으로 늘 열이 났다. 주변의 사람과 상황이 외로움의 주체라고 믿었으므로 보이지 않는 화살을 그들에게 날리느라 어깨 역시 통증과 한기를 달고 살았다. 그러나 거기서 내 ‘외로움’의 모습이 결론 났다면 나는 오늘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오랜 세월 일방적으로 점령당했다고 너무도 순순히 백기를 든 외로움 앞에서, 모든 이유가 사라지고 아주 낯설게 내가 보였다. 그렇게도 많던 외로움의 이유가 포인트를 줄여가는 글씨처럼 점점 작아지고, 내가 볼 수 있는 최대한도까지 나라는 실체가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날이 분명 있었다. 너무도 흔하고 뻔한 단어지만 생애 처음으로 “유레카”를 발음해 본 날이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글을 쓰듯이 ‘외로움’이란 주제를 정해 놓고, 그 주제를 엮고 주제에 대한 설득을 강요하기 위해 온갖 잡다한 상황과 사람을 재주 있게 배치하며 살았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물론 3인칭으로도 나를 건너다보지 못하고 오로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만 나를 기술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못 본 내 안의 세상이 결국은 나의 우주였다는 사실과 그 우주의 주인 역시 그 누구, 그 어떤 상황도 아닌 나, 내가 가고 있는 시간이라는 인식에 도달한 후, 외로움과 ‘도반’으로서의 동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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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1분쯤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하루에 1미리쯤 가슴이 깊어지는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발자국쯤 세상을 더 걷는 것 같았다. 하루에 한 번쯤 숨을 더 쉬는 것 같았다.

많은 시간 내 모든 근간을 차지했고 때로는 점령했으며 당연히 내 삶과 지향까지 하나의 축으로 집결시킨 감정, 외로움!
피하지 않고 더 붙잡았다. ‘너 때문에’ 하지 않고 ‘너와 함께여서’라고 말했다. 한숨과 눈물 대신 하늘과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도 찾았다. 내 모습도 그려내지 못했던 내가 다른 이들의 숨은 외로움도 볼 수 있는 세 번째 눈도 얻게 됐다.

긴 인생길에 사람만이 동행이요 도반이라 할 수 있을까? 나를 뼈아프게 하는 감정도 제대로만 수습하면 더 깊고 더 넓고 더 환한 인생 최고의 지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언젠가, 누군가가, 내 삶과 문학의 도착지에 하나의 팻말을 세우라면 나는 <외로움>을 걸 것이다. 그래서 나는 1분쯤 더 살고, 1미리쯤 더 깊어지며, 한 발자국쯤 더 걷고, 한 번쯤 더 숨 쉬었다고 말하리라.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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