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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판(活版)인쇄’의 부활[이종원의 프리즘 속 세상]
이종원 | 승인 2017.08.22 14:02

[논객닷컴=이종원]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찬란한 인쇄문화를 꽃피웠다. 금속활자는 책을 만들고 보급하는 데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정보의 대량보급은 ‘지식혁명’으로 이어져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켰다.

활판공방의 문선공들이 문서를 쥔 채 납 활자가 박힌 선반을 오가며 필요한 활자를 골라내고 있다. 모든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종원

경기 파주출판단지의 ‘활판공방’은 금속활자의 명맥을 계승한 국내 유일의 납 활자 인쇄공장이다. 컴퓨터 보급이 보편화되면서 자취를 완전히 감춘 활판인쇄를 부활시켜 10년째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작은 활자들을 집어 조판(組版)작업을 하고 있다. ©이종원

“찌거덕 찌거덕” 백열등 아래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령의 숙련된 기술자가 50년은 훌쩍 넘은 듯한 낡은 주조기(鑄造機)를 돌리고 있었다. 비릿한 윤활유와 잉크 냄새가 뒤섞여 콧날이 시큰거린다.

문선, 조판의 과정을 거친 활판에 인쇄되는 시집 ©이종원

그 흔해 빠진 컴퓨터 한 대가 없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목재 선반에 빼곡히 꽂힌 은색 납 활자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돋보기안경 너머로 한 손에 쥔 문서를 봐가며 활자를 하나하나 뽑는 문선공(文選工)의 손놀림엔 한 치의 주저함이 없다.

활판 인쇄는 원고에 맞춰 작은 납 활자를 하나하나 뽑아 조판틀에 끼워야 하는 수작업이다. ©이종원

활판공방은 박한수 대표와 이제는 모두 일흔을 넘긴 옛 기술자들이 뜻을 모아 2007년 문을 열었다. 활판인쇄가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 1996년부터 전국을 떠돌며 활자 주조기와 인쇄기, 활자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몇 안 되는 기술자들도 수소문 한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이종원

옛날 방식 그대로 납을 녹여 필요한 활자들을 만들고 일일이 집자(集字)하여 구식 활판 인쇄기로 한 장 한 장 찍어내 ‘세상에 한 권뿐인 책’을 만들고 있다. 명품에는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듯 활판인쇄의 모든 과정은 수작업이다.

주조(鑄造)는 활자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종원

박한수 대표는 “활판 인쇄로 책 한권 찍는 시간이 컴퓨터 인쇄의 10배, 비용은 20배쯤 들어간다”면서 “돈을 따지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활판만이 가진 장점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 인쇄에는 없는 감촉이 있다”며 “한번 만져보라”며 책을 건넨다.

주조기에서 만들어진 납 활자들을 돋보기로 확인하고 있다. ©이종원

전자식 인쇄 책에 비해 수명도 5배 이상 길어서 활판인쇄 책은 500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박 대표는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문학전집이나 사상전집, 보들레르 전집이나 마르크스 전집 등 오래 보관해야 할 책은 아직까지 활판으로 찍는다”고 설명했다.

활자 선반에서 자모를 뽑아 배열하는 식자 작업 ©이종원

하지만 무엇보다도 옛 방식을 고집하는 큰 이유가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가 금속활자의 종주국이라고 하면서 편리함과 빠른 세태에 밀려서 모두들 오프셋 인쇄로 가는 게 안타까웠다”며 “하나라도 지켜서 장인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인쇄를 부치기 위해 쓴 초벌의 원고(原稿) ©이종원

활판공방 사람들에게 ‘활판 인쇄의 부활’은 우리 문화의 진수를 확인하는 일이자 활자 종주국의 자긍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이종원

 서울신문 전 사진부장

 현 서울신문 사진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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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jong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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