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건의 드라이펜]

[오피니언타임스=임종건] 지난 3월에 출간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최근에 읽었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서전 출간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별세할 경우 장례에 관한 이 여사의 발언 때문이었다.

“전 전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에 국민적 저항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이 여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사후에 어디로 가느냐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사치다. 그 양반 만약 그렇게 되면 나를 화장해서 이북이 보이는 곳에 뿌려달라고 했다”

자서전 어딘가에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지 않을까 해서 719쪽에 달하는 책을 찬찬히 읽어봤으나 이 발언에 대한 별도의 언급은 없었다.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할 경우를 전제로 한 가상적 발언이기는 하나 북한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신의 재를 뿌려달라고 한 것은 의미를 부여할만한 발상으로 여겨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발표한 자서전 표지.

나는 이 말에서 중국의 지도자 등소평과 주은래를 생각했다. 등소평의 재는 유언대로 홍콩-중국, 대만-중국 사이의 바다에 뿌려졌고, 주은래의 재는 자신의 고향인 강소성을 지나는 중국의 젖줄 양자강에 뿌려졌다.

특히 등소평이 대만해협과 홍콩과 본토 사이의 구룡반도에 자신의 재를 뿌려달라고 유언한 것은 중국통일에 대한 그의 염원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 씨가 북한이 바라다 보이는 곳을 말한 것에도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을 것이다.

분단이후 남북관계는 끝없는 대결로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5공 기간 동안 그 대결은 극한적이었다. 1983년의 버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은 북한이 전두환 대통령의 목숨을 직접 겨냥한 사건이었고, 1987년 버마 상공에서의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역시 북측의 소행이었다.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의 소련 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도 냉전시대의 비극이었다.

이 땅에서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말기를 염원하며 한 전직 대통령이 자신의 재를 휴전선에 뿌릴 생각을 한다면 분명 환영 받을 일이다. 아직까지도 사법적 심판이나 국민정서적 심판에서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할 수 없는 전 전 대통령으로선 더욱 그렇다.

최근 한 야당 의원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을 불허하는 내용의 5·18특별법개정안을 냈다. 이 법의 통과 여부와 관계없이 두 전직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에는 많은 논란이 뒤따를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한다면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던 현충원의 대통령 묘역에 억지로 자리를 만들어 묻힌 대통령들보다는 낫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기록원

대통령의 아내로서 퇴임 후 몰아닥친 시련에서 저자가 느꼈을 고통과 미움과 분노는 인간적으로 이해될만한 것이었다. 저자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감정을 다스렸다고 했지만 책의 전편에서 그런 감정이 곳곳에 묻어났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지니는 자기합리화의 한계는 이 책에서도 어쩔 수 없었고, 남편이 할 말을 아내가 나서서 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저자가 그런 시련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어 실천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1989년 백담사 유배시절 ‘국태민안 영가천도 100일 기도’ 때 저자는 광주항쟁 희생 영가 224명의 명단을 적어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했다. 그 후 남편이 영어의 몸이었던 1996년 ‘5·18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과정에서 다시 ‘영가천도 49일 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두 번째 기도는 5공 기간 동안 억울하게 희생된 영가들이 구천을 헤매고 있어 나라가 어지럽다는 어느 스님의 말에 따른 것이었지만, 계속되는 시련이 자신의 기도 부족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저자는 5·18영가 224명 외에 당시 희생된 군인, 시위도중 숨진 학생과 경찰, 이웅산 폭파 희생자 18명, 사할린 대한항공 피격사건 희생자 263명, 버마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희생자 115명 등으로 대폭 확대된 영가들의 명단을 적어서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했다.

백담사 100일 기도 후 설악산 대청봉 등정 길에서 얻었다는 깨달음도 공감을 주었다. 대청봉 정상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엎드려 있었는데 나무건 사람이건 몸을 낮추어야 존재할 수 있는 곳, 겸손한 자만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추위와 세찬 바람 때문에 이내 내려오면서 오래 머물지 못하는 곳이 또한 정상의 자리임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대청봉의 ‘침묵의 설법’이었다고 썼다.

그 깨달음과 실천이 부처를 감화시킬 정도는 아직 안 됐기 때문인지, 저자가 탄식했듯이 5·18이 영원히 풀 수 없는 자신들의 업보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화 ‘택시운전사’를 계기로 전 전 대통령은 또다시 심판대에 오르게 될 모양새다.

이 영화를 본 문재인 대통령이 5·18의 발포책임자를 조사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저자에겐 노태우,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대통령 시절 치렀던 고초가 악몽처럼 다시 떠오를 것이다. 야당 지도자 김대중과 5·18의 인과관계를 생각한다면 김대중 대통령만이 퇴임 후 자신들에게 평화를 주었다는 저자의 회고는 아이러니다. 저자 부부가 진정 평화를 얻을 날은 언제일까? 아마도 전 전 대통령의 재가 북녘 땅이 바라보이는 산하에 뿌려지는 날은 아닐까?  

 임종건

 한국일보 서울경제 기자 및 부장/서울경제 논설실장 및 사장

 한남대 교수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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