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은 장편소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대하여
<시인과 기생의 사랑, 그 소설적 재구(再構)①>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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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한강다리가 눈앞에 바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용산구의 동부이촌동, 빌라맨션이라는 이름의 4층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크기가 약 70여 평은 넘어 보이는 넓은 주거공간이었는데, 유유히 흐르는 노들강이 그대로 내려다보여 전망이 썩 좋았다. 거실에는 각종 삼층장, 반다지 등 고졸(古拙)한 각종 목물(木物)로 채워져 있었고, 방안에는 사군자를 그린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의 열두 폭 병풍이 둘러져 있었다. 아담한 체구의 할머니는 배자(褙子)를 곁들인 비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곤 소파에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방담을 나누었다.
그날 첫 대면을 통해 알게 된 사연은 할머니가 1930년대 서울의 조선권번(朝鮮券番) 출신 기생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함흥에서 거주하던 시절 백석 시인을 운명적으로 만나 이후 3년 동안 함께 동거했던 이야기들, 그리고 숨바꼭질하듯 사랑의 갈등과 아픔을 겪으며 혼돈의 세월을 보내다가 험한 시간의 격동 속에서 마침내 영별(永別)의 아픔을 겪은 이야기들 등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20대 청춘남녀의 대담한 사랑과 동거생활은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짜릿한 애정행각이었을까. 대저 그것이 남녀유별과 봉건적 인식이 엄존하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 새삼 두 사람은 사랑의 선각자였다는 생각마저 든다.
할머니의 호적상의 본명은 김영한(金英韓), 1916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출생으로 무난한 가정이었으나 부친의 별세 이후 힘겨운 가정을 떠나 권번(券番)으로 들어갔고, 기생수업을 받게 된다.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학감(學監)이던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 18678~ 1937) 선생의 문하생으로 여창가곡(女唱歌曲), 궁중무용, 정재(呈才) 등 여러 전통국악의 바탕을 두루 섭렵하고 당당한 기생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문학적 재능이 있어서 틈틈이 수필을 썼는데, 이것이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1901~?)의 눈에 띄게 되어 그가 운영하던 대중잡지 <삼천리(三千里)>에 두 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한다. 한 편은 밤늦게 가족들에게 줄 감귤 봉지를 안고 추운 겨울밤 골목길을 가다가 미끄러져서 감귤이 온통 쏟아진 광경을 다룬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주국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溥儀, 1906~1967)가 1930년대 후반 서울을 다녀갔을 때 요정에서 그를 직접 영접했던 인상기이다.
스승 하규일 선생이 기명을 지어주었는데 진수무향(眞水無香)에서 집자를 한 진향(眞香)이었다. 이밖에도 김숙(金淑)이란 또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해서 이름이 왜 그리도 많으냐는 나의 물음에 자신은 한국의 마타하리(Mata Hari, 1876~1917)처럼 살고 싶었다는 야릇한 술회를 한 적도 있다. 그것은 다양한 교제와 인맥으로 연결되는 자신에게 어떤 정치적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야(子夜)란 이름은 시인 백석과 함께 동거하던 시절, 시인이 당시(唐詩)를 읽은 뒤에 이백(李白)의 시에 등장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직접 붙여준 것이어서 특별한 애착이 간다고 했다.
나는 자야 여사와 그날 첫 만남 이후로 약 10여 년 간 매우 각별하게 지냈다. 전화로 다정한 안부를 서로 묻고 자주 초청을 했었다. 내가 주로 찾아갔고, 자야 여사도 내 우거(寓居)를 가끔 다녀갔다. 서울올림픽 개막식이나 모스크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등 큰 행사나 볼거리가 있을 때는 미리 입장권을 구해놓고 나를 초청했다. 맛깔스런 서울토박이 음식을 장만해놓고 일부러 다녀가라는 정겨운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맛있는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일일이 숟가락에 올려주기도 했다. 그 친절을 백석 시인께 대한 못 다한 정성의 표시로 받아달라는 말까지 했다. 저녁시간이면 마주 앉아 백석 시인과 관련된 여러 추억담을 장강대하(長江大河)로 펼쳐놓느라 자정이 넘는 줄도 몰랐다. 옛 추억으로 흥이 달아오르면 반다지 속에 감춰놓았던 위스키를 꺼내 와서 직접 권하며 아득한 세월의 강을 한참이나 타임머신을 타고 노를 저어 상류로 올라갔다.
함흥에서 백석 시인을 만나던 시절, 후미진 북방의 차디찬 지방도시에서 시인과 기생이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애틋한 추억들, 토닥토닥 어김없이 찾아오던 사랑싸움, 시인이 사랑을 선택하느라 함흥의 직장까지 사직하고 서울로 옮긴 이야기, 서울 청진동 집에서 한 쌍의 비둘기처럼 도란도란 사랑을 속삭이던 이야기, 함대훈(咸大勳), 정근양(鄭槿陽), 허준(許俊) 등 시인의 다정한 문단친구들이 찾아와 왁자지껄 흉허물 없이 함께 어울려 놀던 이야기들, 시인이 돌연 만주행(滿洲行)을 제안하면서 점차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된 이야기 등등 얼마나 많고도 많은 이야기를 가슴 속에서 갈무리해오다가 드디어 폭포처럼 쏟아놓았던가. 그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좁은 흉중(胸中)에 꽁꽁 다지며 간직해오느라 얼마나 힘든 시간이 많았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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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귀한 이야기들을 그냥 듣고 흘려보내기란 하나하나가 너무 아깝고 소중한 문화사적 자료였다. 그래서 내가 제의하기를 긴긴 밤 잠 오지 않을 때 백석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라고 했고, 자야 여사는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로 매주 한 차례씩 편지가 날아왔다. 어떤 주에는 두 차례나 보내오기도 했다. 편지에는 대화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이 깨알 같은 정성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많은 편지들을 펼쳐놓고 컴퓨터에 한 글자씩 옮겨 시간적 순서에 따라 재배열한 뒤 다시 깁고 다듬어 발간한 것이 자야 여사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2011)>이다.
사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백석 시인과 헤어지고 난 뒤 그녀의 가파른 행적과 삶이다. 그때가 일제말이었고, 자야 여사는 여전히 기생신분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험난한 세월 속에서 8·15해방을 맞이했을 터이다. 보다 구체적인 당시의 이야기를 캐 물으면 아무리 취중일지라도 정색하며 입을 다물었다. 차마 내색할 수 없는 아프고 쓰라린 악몽의 기억들이 많았으리라 짐작된다. 해방 후에도 여전히 출중한 해어화(解語花)의 하나로 미군정기(美軍政期)의 중요인물들, 이를테면 한민당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87~1945), 부통령을 지냈던 장면(張勉, 1899~1966) 등등과 어울리며 친밀한 교분을 나누었던 듯하다.
이승만정권이 출발하면서 고위정객이었던 이모(李某) 씨와 인연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작은 살림을 차려 소실(小室)로 들어갔다. 모씨는 기생 진향과 함께 지내면서 장중보옥(掌中寶玉)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이튿날 하게 될 연설문 원고를 진향이 직접 다듬었다. 모씨가 방안을 뒷짐 지고 거닐며 구술(口述)로 외우면 진향은 이를 원고로 옮겼고, 다시 외우게 해서 고칠 곳을 손질하였다. 이렇게 여러 해를 살다가 서로 헤어지게 되었을 때, 모씨는 작별을 아쉬워하며 진향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그것이 현재의 길상사(吉祥寺)가 된 성북동의 7천 평 규모 부동산이다. 그곳은 서울 도심에 위치하면서도 마치 천연요새(天然要塞)와도 같이 산골짜기 하나를 온통 차지하고 있다. 계곡에는 맑은 개울물이 쉼 없이 흘러내린다.
내가 자야 여사에게 들었던 비화(祕話)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 사찰이 위치한 그곳은 원래 왕조말기 어느 친일부호이자 고위직을 지낸 관리의 별장이었다고 한다. 나라가 일제에게 패망하자 친일인사는 그곳을 조선총독부에 헌납했고, 총독부에서는 비밀스런 안가(安家)로 사용하였다. 일본의 왕족이나 정객들이 조선을 방문할 때 여러 날 묵어가는 은밀한 장소였다. 8·15후 그곳은 다시 미군정청(美軍政廳) 관할로 넘어갔고, 미군 첩보기관(CIC)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필시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이 머물던 경교장(京橋莊), 이승만이 집무를 보던 경무대(景武臺, 지금의 청와대) 등을 도청(盜聽)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감시기관이었을 것이다. 미군정 3년이 끝나고 자유당정부가 이를 인수하게 되었을 때 정부의 상당한 책임자였던 모씨는 이 부동산 문서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지하고 있다가 첩실(妾室) 진향에게 이별의 정표로 재산권을 넘겨준 것이다. 이만큼 격동기의 국유재산 관리는 이렇게도 어설프고 부정확했던지 실소(失笑)마저 자아내게 한다. 모씨는 이 등기문서를 주면서 밥을 굶는 일이 있을지라도 잘 지니라며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진향은 부산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당시 백철 선생이 재직하던 중앙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해서 공부하던 중이었는데 부산으로 옮겨가서도 요정을 운영하며 전시연합대학에 나가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이에 대해서는 시인 고은이 쓴 <1950년대> 서술부분 참조) 자야, 즉 김진향은 그 난세의 격동 속에서도 성북동의 이 부동산을 소중하게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1970년대부터 요정을 열었고, 명칭을 대원각(大苑閣)이라 하였다. 진주 출생의 대중음악작곡가 이재호(李在鎬, 1919~1960)의 부인 김모 여인과 평소 의형제처럼 지냈는데 그녀에게 대원각을 대리자로 관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워낙 큰 규모라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요정경영도 항시 부실하였다. 그리하여 진향은 혼자서 감당하기 벅찬 이 재산을 처음엔 사회에 환원할 생각을 가졌다. 대학에 기증하려다가 여러 이유로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이곳을 종교기관으로 탈바꿈할 계획을 갖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진향 자신이 자주 말했던 화법으로 ‘내 남루한 영혼을 속죄하기 위해서’라고 그 이유를 솔직히 밝힌 바 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인물이 불교계의 승려 법정(法頂, 본명 박재철, 1932~2010)이었다.
승려와 여러 차례에 걸쳐 대면을 가졌지만 진향은 선뜻 기증의 확신을 갖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상담 차 사찰로 가는 그녀를 따라 송광사(松廣寺)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번복을 거듭하던 끝에 마침내 헌납으로 가닥이 기울게 되었고, 이 소식은 다음날 조간신문에 즉각 대서특필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야, 즉 기생 진향을 일부러 찾지 않았다. 여러 신문이나 여성잡지 등 저널리즘에서 다루어지는 한 기생의 부동산 헌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백석 시인과의 사랑은 마치 하나의 장식품처럼 반드시 따라다녔다. 시인이 만약 살아서 이 경과를 낱낱이 지켜보았다면 얼마나 착잡하고 만감이 교차했을까 생각하였다. 시인 백석과의 사랑을 몽매간에도 잊지 못하며 살아왔다고 진향은 스스로 입버릇처럼 술회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인을 위해 그녀가 마음을 쓴 정성이란 고작 백석문학상(白石文學賞) 기금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길상사 관련기사들을 읽어보면 거의 사실에서 벗어난 조작되고 왜곡된 부박한 내용들로 윤색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허다한 곡절과 사연들이 있지만 이제 와서 달리 그 무엇을 세세히 피력할 까닭이 있으며, 또 그것을 낱낱이 분별하여 무엇하리오. 모름지기 세속(世俗)의 실체란 본뜻과 전혀 상이하게 포장되고 꾸며져서 마치 그것이 정설인양 시간 속을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표면적 사실은 결코 진실이 아닌 경우가 허다히 존재한다는 냉엄한 진실만 소스라쳐 깨달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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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백석시전집>이 발간된 이래로 무려 30여 성상(星霜)이 쏜살처럼 흘러갔다. 그동안 백석 시인과의 사랑으로 세간에 화제를 뿌렸던 기생 진향도 세상을 떠났고, 막대한 부동산을 시주받았던 승려도 이미 속진(俗塵)을 떠났다. 길상사에는 기생 진향의 흔적만 한쪽 귀퉁이에 쓸쓸히 남아있고, 속 모르는 대중들은 법당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소용돌이와 화제의 물결은 다시 잔잔해지고, 세월은 또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다.
1999년으로 기억된다. 백석 시인이 1995년, 83세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뉴스로 알려졌다. 60년대 초반 북한문단의 중심에서 숙청되어 머나먼 자강도(慈江道)의 해발 800미터 산촌마을에서 살아가는 초라한 양치기로 고달픈 생애를 보낸 시인의 극심한 곤고(困苦)의 세월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신의 시전집이 1987년 서울에서 발간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머나먼 북녘 후미진 산골오두막에서 쓸쓸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보도를 접하게 되니 야릇한 연민과 애달픔이 밀려와서 가슴이 아렸다.
그리곤 잇따라 떠오른 생각은 한 시인의 고결함과 신산(辛酸)했던 생애, 기생 진향의 곡절 많은 삶과 엄청난 부동산 헌납, 그리고 한 승려와의 상관성은 전혀 형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시인과 기생, 승려 셋을 반드시 함께 엮으려는 세간의 시도는 얼마나 비속(卑俗)하고 무리한 엮어내기인가. 백석 시인이 생존 시에 이 재산헌납의 사실과 배경을 만약 알았다면 얼마나 그 물질주의의 저급성(低級性)에 침을 뱉고 냉소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거기서 내 이름을 즉시 빼라고 대성일갈(大聲一喝)하며 못마땅해 했을 것이다.
백석 관련 여러 저술들이 속속 출간되는 저간(這間)의 흐름 속에서 이번에 작가 이승은이 발표하는 장편소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고유의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은 애독자들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표제로 삼았다. 작품의 전개와 구성은 시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기생 진향의 시각으로 그녀의 삶, 백석 시인과의 시간성을 세밀하게 추적해 들어간다. 백석 테마 소설작품으로서는 말 그대로 최초이다. 백석학(白石學)의 관점에서도 이 작품은 일정한 의미와 가치성을 담보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가 이승은이 아직까지 문단에 특별한 작품발표 경력을 갖지 않은 신진이며 무명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막상 읽어보면 마치 저널리즘의 문체를 방불하게 하는 간결성, 깊은 울림이 있는 문장으로 방대한 세월의 분량을 거뜬히 정리 압축해내는 지혜와 끈기, 냉철함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소설작품의 형식과 구성으로 형성된 문학적 재구(再構, reconstruction)의 체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1930년대와 일제말이라는 근현대사의 새로운 통찰과 경험을 갖게 된다.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는 실제 역사적 인물들의 구체적 활동과 경과는 상당부분 작가적 상상력과 직관력(直觀力)에 기초하여 축조된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은 아무리 유익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할지라도 일단은 흥미를 유발시키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놀라운 것은 작가가 시인 백석과 기생 진향의 생애, 그리고 그들의 시대에 대한 전반적 서술과정을 통하여 매우 진진한 흥미와 기대를 지속적으로 유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한 대목을 읽고 나면 그 다음 부분에 대한 강렬한 흥미와 호기심으로 이어지도록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그것은 마치 독자들과 함께 백석, 진향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한국근현대 문화사의 여러 유물과 유적지를 직접 이동해 다니며 친절하게 소개하는 문화해설사의 포즈이기도 하다. 작품의 총체적 구성에서 풍겨나는 근현대시기의 문화적 양상과 효과는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한 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한 가슴 설레는 감동마저 느끼게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독립적 소설작품으로서도 물론 의미가 있을 터이지만 한편의 영화작품으로 제작되어도 손색이 없는 매우 잘 짜인 상상력과 예술적 미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백석 시인을 장편소설 장르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되니 백석학 선행연구자(先行硏究者)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뿌듯하고 흐뭇하다. 독자 여러분은 소설 속에서 백석 시인과 호젓이 만나 그의 인간적 풍모와 문학적 감수성까지 두루 경험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시인과 기생의 애틋한 사랑! 1930년대를 중심배경으로 펼쳐지는 한국 근현대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실감나게 재현시키며, 독자들로 하여금 정감 넘치는 민족적 삶의 온기와 애환을 두루 체득하도록 터전을 마련해준 작가 이승은의 정성어린 노력에 다시금 격려와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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