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구의 문틈 금융경제]

[오피니언타임스=김선구] 강북의 중산층 아파트에 산다. 토요일 오후 아파트단지에서 친구들과 놀면서 영어공부 이야기를 하는 초등학교 4학년 남자애한테 물어보았다. 너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대기업 취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 그렇게 생각 하냐고 다시 물으니 자기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단다. 부모가 현실의 한계를 너무 잘 알아서인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주된 목적을 오로지 좋은 직장에 입사하거나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한 수단에 두고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선망의 대상인 직장들에서 일류대학출신을 많이 뽑다보니 먹이사슬처럼 초등학교부터 중고교까지는 일류대학 입학에 유리하다고 소문난 차기경로를 찾아 숨가쁘게 달려간다.

©픽사베이

원론적으로 고용주는 일 잘 할 직원을, 대학은 공부 잘 할 학생을 뽑으려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기업들은 그 동안 입사전형의 방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왔으나 소위 스펙에 치중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스펙 위주의 전형이 일류대학만 졸업하면 인생이 수월해진다는 그릇된 인식을 낳아 대학입학에만 매달리고 그 이후 학습과 자기계발을 등한시하는 풍조를 조장하기도 했다.

대기업, 금융권 그리고 공기업의 2017년도 하반기 채용시즌이 막을 올리고 있다. 대통령이 공기업에 블라인드 채용을 독려하고 나서면서 민간 기업들도 눈치를 보며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다.

사회적 모순을 바꾸는 길이 두 가지 있다. 여론의 압력에 따라 소수자나 약자보호처럼 정부가 입법을 통해 강제하는 수단을 동원하여 오랜 폐습을 뜯어고치는 게 효과적일 때가 있고 다른 하나는 민간주체들이 고쳐야할 필요를 스스로 깨달아 바꿔나가는 변화이다.

블라인드 채용과 거의 비슷하면서 더 오랜 역사가 있는 게 블라인드 오디션이다. 보스톤 교향악단에서 1952년 최초로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고 1969년 흑인 2명이 뉴욕교향악단을 상대로 인종차별소송을 제기한 이후 1970년대에는 거의 모든 교향악단에서 블라인드 오디션을 도입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 미국 내 교향악단은 거의 대부분의 단원이 백인 남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교향악단 감독들은 이를 실력있는 연주자들이 대부분 백인 남자라서 그렇다고 변명하곤 했다. 그러나 블라인드 오디션이 도입된 후 여성단원이 25~46% 가량 남자보다 더 선발되고 있다고 한다. 블라인드 오디션시 여성지원자들이 신고 온 하이힐 소리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사위원들이 알아차리는 걸 막기 위해 두꺼운 카펫을 깔아놓을 정도로 세심한 준비를 하고 있다.

전세계 고급인력들에게 선망의 직장인 구글은 6개월에 걸쳐 25회에 걸친 까다로운 면접을 통해 직원을 선발해온 걸로 유명하다. 대학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춘 지원자에게 대학입학자격시험인 SAT 점수를 제출케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글사가 2014년 처음으로 발표한 인력구성분포에서 70퍼센트가 남자이고 흑인과 히스패닉은 합쳐서 5퍼센트에 그치는 등 다양성에서 크게 부족한 사실이 공개되었다. 구글도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인력풀이 중요하다고 알기 때문에 채용 편중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쏟기 시작했다고 한다.

직원 공모에서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채용담당 인사부서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아나로그식 방식에 머무르고 있다는 평가다. 수십년간 학계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인간은 채용을 하는데 무척 불완전하다고 한다. 금융, 법률, 컨설팅업계에 관한 연구 중에는 채용담당자들이 면접 시 여가활동이나 개성에서 자기들과의 동질성에 따라 심한 편견을 보인다는 결과도 나와 있다. 시카고대와 MIT대학에서 2003년 실시한 연구도 눈길을 끈다. 동일한 지원자의 절반은 흑인, 나머지는 백인 이름으로 지원했더니 백인 이름의 지원자에게 50%나 많은 면접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명기업들은 채용을 외부전문기업에 맡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고객사와 함께 각 직무에 필요한 스킬 목록을 작성하고 이를 테스트할 문제를 만들어 지원자가 온라인으로 작성케 한다. 채용할 회사는 채용할 인원에 해당되는 숫자의 커트라인만 알려준 후 합격선내에 있는 지원자의 이름과 이력 등을 그 후에야 받아보고 최종 면접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도입하는 블라인드 채용을 보며 우려가 앞선다. 스펙만 가린다고 인사부서의 편견이 없어지는 게 아닌데 얼마나 준비를 하고 시도하는지, 시행에 앞서 외국처럼 많은 고민을 했는지 의문이다. 준비없이 급하게 밀어붙이는 모습이 마치 반복되는 녹화영상을 보는 듯해 씁쓸하다.

 김선구

 전 캐나다 로열은행 서울부대표

 전 주한외국은행단 한국인대표 8인 위원회의장

 전 BNP파리바카디프생명보험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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