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세상이 온통 불확실하다. 현재도 그렇고 미래는 더 그럴 것이다. 정치도, 경제도, 안보도, 기후도 모두 불확실성의 짙은 안개에 갇혀 있는 형세다. 칠흑 같은 밤, 거친 바다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별이나 나침반도 없이 항해하고 있는 기분이다. 여기서 불확실성(uncertainty)이란 앞으로 예상되는 여러 가지 상태들(states) 가운데 어떤 상태가 실현될지 모르는 상황을 지칭한다. 예컨대 내일의 날씨를 ‘맑음’과 ‘흐림’이라는 두 가지 상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면 현재 우리는 날씨에 관한 한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비유지만 기본 원칙은 복잡한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아무리 문제를 들여다봐도 좀처럼 정답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픽사베이

세상 만물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한다면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만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맞는다면 이분법은 의미가 없다. 실질적으로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불확실성에도 범위와 정도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상황과 기후변화의 장기적 영향 및 파괴적 기술혁신의 속도 등을 감안할 때 우리는 전대미문의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미시적, 거시적 환경의 본질이다. 불확실성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거나 부를 축적해 온 일부 특권 계층을 제외한다면 불확실성은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누구든 파산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사실 불확실성은 비단 오늘날의 문제는 아니다. 인류역사 나아가 우주역사 전체가 불확실성의 지배를 받으면서 전개되어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과학 용어를 빌리자면 열역학의 제2법칙은 닫힌계(closed system)에서 불확실성과 무질서를 상징하는 엔트로피(entropy)는 결코 감소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간이 경과하면 무질서와 불확실성은 점점 증가하게 되어있다는 말이다. 닫힌계는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무질서와 불확실성이 점점 증가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을 충족하는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수많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불확실성을 감안한다면 이런 경향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불확실성을 창출하는 주체는 다양하며 대체로 자연, 인간 및 제도를 들 수 있으므로 인간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자연이 창출하는 불확실성이 압도적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인간과 제도 나아가 이 둘의 상호작용으로 인한 불확실성이 점점 더 우리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연이 창출하는 불확실성으로는 지진이나 쓰나미의 발생 가능성이라든가 최근 미국을 강타한 허리케인의 위력과 관련된 것들을 들 수 있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이런 현상들 또한 점점 예측하기 어려워진다는 면에서 자연이 창출하는 불확실성도 점증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과 제도, 나아가 이 둘의 합작으로 인해 창출되는 불확실성이다. 2008년 금융위기도 인간의 탐욕과 허점투성이 금융제도의 합작품이다. 우리는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 엄청난 불확실성이 금융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그래서 불확실성으로 인한 후유증이 더 클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우리는 막대한 대가를 치렀다. 그런데 앞으로 종전 보다 훨씬 큰 규모의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다. 금융시장을 진원지로 하는 시장경제의 불확실성은 어쩌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발전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유사 이래 가장 불확실성이 고조된 현실, 나아가 파괴적 기술혁신으로 인해 불확실성이 더욱 확대될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모든 것이 점점 더 불확실해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런 미래를 살아야 하는 후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지진이나 쓰나미같은 자연 재해도 커다란 불확실성 중 하나다. ©픽사베이

경제학에서 불확실성은 시장경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불확실성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시장경제의 성과가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까지는 경제이론에 불확실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미국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과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 교수가 이 방면에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불확실성을 “측정 가능한 불확실성(measurable uncertainty)”과 “측정 불가능한 불확실성(unmeasurable uncertainty)”으로 구분했으며 비로소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다양한 수단을 개발할 수 있었다. 여기서 측정 가능성 여부는 확률을 부여할 가능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확률을 부여할 수 있으면 측정 가능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측정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나이트는 측정 가능한 불확실성은 곧 위험(risk)을 의미한다고 규정했다.

이와 같은 나이트의 견해는 큰 틀에서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가 직면하는 불확실성은 여전히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측정 가능한 것과 측정 불가능 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지배적인 현상인가 하는 점이다. 한편에서는 여러 가지 불확실한 상황에 확률을 부여함으로써 더 이상 막연히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확률에 기반을 둔 위험으로 간주됨으로써 다양한 대응방안이 고안되고 발전해왔다. 다양한 금융상품 및 금융기법, 그리고 각종 보험상품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 확률에 바탕을 둔 경제적 사고와 행동이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금융시장이 발달하고 금융자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확률적인 관점에서 해석되고 거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금융시장이 이런 방향으로 발전해온 것이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확률 현상은 대체로 반복되는 사건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일회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 종종 발생하는 금융시장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다. 한 마디로 위험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측정 불가능한 불확실성” 그 자체로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대변했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를 들 수 있다. 케인스는 『확률론』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확률에도 일가견이 있던 학자였다. 사실 예로부터 확률은 매우 다루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당시에는 고전적인 확률, 즉 빈도(frequency)에 기초한 객관적인 확률 개념만이 인정받고 있었는데 케인스는 현실에서는 이런 확률을 측정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카지노에서는 가능하지만) 생각했기에 확률에 기초한 이론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서는 나이트가 말한 측정 불가능한 불확실성이 지배적이고 이에 대비하는 수단으로 가능한 것으로는 인간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뿐이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이 말은 확률에 기초한 분석을 바탕으로 불확실성에 대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자신의 동물적 감각 내지 직관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케인즈의 입장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매우 역설적이다.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엄청난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에 대처하는 마땅한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셈이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는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한 사건이었다.

역사적으로 조망해보면 글로벌 차원에서 불확실성이 현저하게 증가하게 된 계기는 1971년 8월 15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후 글로벌 경제가 경험했던 각종 시련은 거의 대부분 인간과 제도, 그리고 이 둘이 합작해 창출한 불확실성에서 비롯되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경제질서를 논의했던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서 금 1온스는 35달러에 고정되었고 원하는 사람이나 기관은 이 가격에 달러를 금으로 바꿀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통화들은 모두 일정한 환율로 달러에 고정시키고 필요한 경우에는 일정 범위 안에서 변동을 허용함으로써 국제통화질서의 안정을 도모하려 했다. 그런데 이런 환율정책 하에서 미국의 달러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게 되자 미국은 달러 가치 보호를 위해 고육지책으로 금과의 교환을 정지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 결과 단기간에 국제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크게 고조되었으며 그 여파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진보적인 논객이었던 하버드 대학교의 존 갤브레이스(John K. Galbraith, 1908~2006) 교수는 1977년 『The Age of Uncertainty』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고 TV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영했다. 그의 작업을 통해 20세기 후반기에 들어 시장경제에 내재되어있는 불확실성의 문제가 일반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갤브레이스는 시장경제 자체적으로는 이런 불확실성을 완화시킬 힘이 없기에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갤브레이스와 반대 견해를 가졌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 교수는 갤브레이스의 진보적인 견해를 반박하고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켜주는 자유시장의 미덕을 찬양하는 『Free to Choose』라는 책을 썼고 또한 이를 바탕으로 TV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갤브레이스를 논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대는 이런 식으로 진보적 사상과 보수적 사상 간의 팽팽한 긴장이 지속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픽사베이

그러면 이런 역사적 경험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갤브레이스와 프리드먼 간의 논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시장경제에서 불확실성은 극소수의 특권 계층을 제외한 다수에게는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요인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이 다시 살아서 현재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목격한다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의 지속적인 확대는 이에 대처하는 수단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시장경제는 더욱 불확실해질 것이다. 파괴적인 기술혁신으로 일자리가 소멸된다면 앞으로 사람들은 직장을 구할 때 더 큰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런 복합적으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개인이나 기업 나아가 정부도 미래를 위한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한계가 있다. 이들이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문제가 발생한다면 시장경제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질 것이다. 합리적인 행동은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그래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택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에 어떤 국가라도 보편적인 요인들과 특수한 요인들에 근거한 불확실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우세한가에 따라 개별 국가에 만연한 불확실성의 성격이 좌우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에는 북한의 도발로 인한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일시적이었고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따라서 이것은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의 원인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은 다르다. 공교롭게도 북한과 미국의 정치 지도자가 모두 비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대치하고 있는 쌍방이 모두 비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경제학에서 개발된 게임이론은 게임에 참가한 모든 경기자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한다. 만약 이 가정이 위반된다면 결과의 불확실성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극도로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종전과 별 차이 없이 평온하고 차분하게 행동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놀라운 광경일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 유사한 사례로부터 얻은 학습효과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납득하기 어렵다. 어떻게 이런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마도 만약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피할 수 없다는 절망감, 그리고 이런 상황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생각하기에 한국인들이 차분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 추측할 뿐이다.

현재 글로벌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시적, 거시적 상황을 살펴보면 불확실성은 점점 널리 확산되고 있으며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일찍이 케인스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직면한 불확실성에 대해 확률을 부여하고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효과적인 방안을 제시하기 어렵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마냥 불확실성의 쓰나미가 우리를 덮치도록 방치할 수도 없다. 이에 대한 최소한의 대응방안은 적절한 정보와 합리적 사고 및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보는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상당한 정도로 불확실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은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서로 모순되는 정보가 공존하면서 널리 공유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불확실성을 확대시킬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특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오늘의 상황에서 정부는 엄청난 정보의 바다에서 일반대중에게 꼭 필요한 정확한 정보를 추출하거나 생성해 적절한 채널을 통해 이들에게 알려주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역대 한국 정부는 모두 실패했다. 과거 정부가 오히려 불확실성을 확대시키는 원인을 제공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정부는 이런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바란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누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익혀야 할 것이다. 당장은 효과가 없겠지만 누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게 된다면 그 만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하기 쉬워질 것이고 그만큼 불확실성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미래에 닥칠 초(超) 불확실성에 대비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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