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요섭의 동호지필]

[오피니언타임스=조요섭] 조진웅, 송승헌 주연의 <대장 김창수>라는 영화가 다음달 개봉을 앞두고 있다. 김창수는 백범 김구 선생이 수차례 개명을 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옛 이름이다. 배우 조진웅이 김구 선생의 역할을 맡았다. 김구(金九)는 김창암, 김창수, 김구(金龜)에 이은 선생의 마지막 이름이기도 하다.

지금껏 숱한 시대극이 나왔건만, 김구 선생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없었다. 그는 한국 근대사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출생하여 1948년 단독정부 수립과 1950년 한국전쟁 발발의 딱 중간쯤의 시기인 49년 6월 암살되어 숨을 거두고 마니, 선생의 연표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걸어온 길 자체가 가슴 절절한 반도의 근대사다. 그렇기에 그를 막연한 위인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좀 더 깊이 있는 시각으로 재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주말, 도서관에 들러 대출할 책을 고르고 있을 때 석양빛의 표지를 가지고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옛 책 복원전문가가 제작한 초판 복제본의 백범일지였다. 오랜 세월의 먼지와 얼룩까지 재현해 낸 그 책을 나는 곧바로 집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타인에 의해 정제된 평전 같은 것이 아닌 본연 그대로의 자서전을 말이다.

47년 개천절, 선생은 담담한 어조로 저자의 말을 남겼다. 백범일지를 “잘난 사람이 아니라 못난 한 사람이 민족의 한 분자로 살아간 기록”이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나는 백범(白凡)이라는 활자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일지를 ‘日誌’가 아닌 ‘逸志’로 적은 데서 선생의 의중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逸志의 사전적 의미는 ‘훌륭하고 높은 지조’라 할 것인데, 이는 결국 백범일지가 비단 한 개인의 자전적인 기록이 아니라 그의 시각으로 무수한 범인들의 민족을 담아낸 기록이라 하겠다. 즉 범(凡)이 모여 비범(非凡)이 되는 모순의 광경을 목격한 선생이 일지의 뜻을 그것으로 정한 것에 나는 홀연히 숙연해져 이미 굳게 동의를 하는 바였다.

상권 속 선생의 삶에는 여러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종교와 학문에 몸을 담았다. 유학을 공부하여 조선의 마지막 과거를 치렀으나 급제를 하지 못하자 이후에는 만민평등 사상의 동학을 믿고 공부하게 된다. 그러고는 어린 나이에 접주가 되어 동학농민봉기 과정에서 해주성 공략의 선봉장을 맡기도 하는데, 긴 혈투 끝에 패배를 맞자 이번엔 불가에 들어가 걸시승이 된다. 또한 후일에는 신민회에서 활동하며 기독교를 믿기도 했으니 그에게 종교란 서로 배척되지 않는, 벽이 없는 믿음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삶에서 스스로 종교를 융화하고 편협하지 않은 믿음을 가졌으니 그에게는 독립 자체가 신앙이고 민족들이 교우였던 것이다. 나는 특히 믿음의 역행을 마다하지 않던 선생의 태도에 주목하고 싶다. 그는 동학에 입교를 한 후에도 다시 유학을 가르치는 고능선 아래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포용력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결점을 지적한 이가 바로 고능선이었고 그 결점은 과단성이었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고능선이 선생에게 주었던 전언은 일지에 활자로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과단성의 가르침은 선생이 평생 의병적 정신을 갖춘 행동지향형 인물이 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언젠가 안경을 벗고 있는 선생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매우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진은 안경을 쓴 얼굴이 인자한 웃음을 지고 있는 모습인데, 내가 봤던 사진 속 선생의 얼굴에는 아주 비장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고능선과의 일화를 알게 되니 포용과 과단이라는 두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단 것으로 그날의 낯섦이 뒤늦게 설명되는 것 같았다.

“이 몸은 이미 왜에게 선전포고를 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선에 선 목숨이다.”

상권은 선생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맡고 2년여가 지났을 무렵 쓴 것이다. 일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가 아들들에게 남기는 유서와도 같았다. 그는 자신을 본받으으라는 것이 아니라 동서고금의 많은 위인 중 누구든 숭배할 만한 이를 택하여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바람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선생은 아버지로서의 가르침에서도 아들들이 누구든 택해도 된다는 포용과 배우고 본받아 행동해야 한다는 과단을 두루 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위인’에는 자신이 몸담았던 종교의 성자들만이 아니라 생활 속 범사에서 두루 스쳤던 범인들을 함께 일컫는 의미였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고능선과 의탁을 했던 안태훈(그는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있다. 여사는 독자인 아들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고 임정 요인들을 뒷바라지한 정신적 지주였다. 여사는 누군가의 어머니에서 그치지 않는,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인이었다. 이렇듯 책은 자서전의 형식으로 담아낸 무수한 범인들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임시정부를 중경으로 옮긴 후 선생이 쓰기 시작한 하권에는 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의 본격적인 투쟁사가 담겨 있다. 그는 “나를 테러의 괴수라 하였으나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광복을 위하여 이 이상의 방법이라도 취했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의열 투쟁 노선에 대한 신념을 견고히 한다. 해외에 있는 임정의 지도자로서, 강점을 당한 조국과 국민의 힘을 기대할 수 없던 상황에서 내린 뼈아픈 결정이었을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민족이라는 절대 가치 아래 국제 정세나 이념의 굴레에 타협하지 않은 지도자였다. 일제 강점 직후와 미소 냉전 돌입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오직 겨레라는 신념 하나를 높이 제고한 것이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그런 것은 자신의 가슴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그가 백범일지의 말미에 남긴 <나의 소원>이 이토록 뜨겁고 아프게 읽히는 이유는, 70여 년의 일생을 통해 증명한 그의 진심이 생생한 육성으로 들려오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나의 소원>을 통해 단순한 합일이 아닌 민족의 다양성의 인정과 조화 그리고 공존을 말하며 당신의 소원을 열렬히 뱉어냈다.

“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 여러 나무가 어울려 위대한 삼림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피어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룬다.”

“오늘은 남문 밖 호숫가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운하에서 잤다”라는 구절을 되새겨본다. 선생이 중국 가흥에서 은신하며 배에서 잠들던 시절의 글이다. 감시와 추적 속에 딛을 땅이 없어 물 위의 배로 몸을 뉜 채 추위를 견뎠을 것이다. 선생은 배 위에서 달을 보며 속으로 어떤 꿈을 그렸을까. 선생의 꿈은 고국의 땅으로 돌아와 두 발을 딛고 나무와 꽃 같은 범인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이 시대 우리에게 그대들의 소원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과연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조요섭

어쩌면 미학이란 것은 노동자에게 주어진 빵과 우유보다 훨씬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이후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하는 사람입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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