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1958년 비가 내리는 어느 가을 저녁, 독고준의 하숙집으로 친구인 김학이 소주 한 병과 오징어 두 마리를 들고 찾아온다. 둘은 소주를 마시며 학술동인지 ‘갇힌 세대’에 실린 독고준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 땅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회의를 품고 있는 독고준은 집단과 혁명을 앞세우며 동인회(同人會)인 ‘갇힌 세대’에 들어오라는 친구의 제의를 시니컬하게 거절한다. “혁명은 언제나 최대의 예술이지만 그 예술이 불모의 예술인 것은 이미 실험이 끝난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한국전쟁의 포로로 남도 북도, 타락한 민주주의도 변질된 사회주의도 싫어 제3의 장소를 택했지만 그곳 역시 광장이 아닌 밀실일 수 밖에 없다는 절망으로 바다에 몸을 던진 소설 <광장>의 이명준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독고준은 남이면서 북이고자 했고, 민주주의이자 사회주의이고자 했으며, 자유이자 평등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단단한 도그마로 굳어져버린 이 땅의 이데올로기는 그에게 자유 없는 민주주의였고, 평등이 사라진 사회주의였다. 이 끔찍한 인간상실의 이념들, 오직 그 메말라버린 이념의 잣대로만 인간을 구분 짓고 피아를 구분 짓는 세상을 체험한 그에게 선택은 절망이자 자아상실일 뿐이었다.

흑백논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독고준은 집단이 아닌 ‘개인’이고자 했다. 집단의 요구에 순응하고, 개인의 자유와 모순되는 집단의 이념의 지배를 받고, 언제나 ‘나와 한 편’이 아닌 것은 모두 적(敵) 아니면, 흑(黑)으로 몰아버리는 이념의 독선을 그는 거부했다. 독고준은 지금도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우리사회 곳곳에 살고 있다.

소설가 최인훈의 ‘회색인’. 주인공 독고준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존재를 찾아 고뇌한다. ©교보문고

‘회색’은 적(敵)인가

소설가 최인훈은 그들을 ‘회색인’(灰色人)이라고 불렀다. 이성적이든, 맹목적이든 선택하지 않은 자는 예나 지금이나 ‘회색의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서 흑백이 만드는 세상을 바라보기만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갇힌 인간’들이 횡행하는 세상에서 열린 인간이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소외일 뿐이기 때문이다. 흑과 백 어디에서도 그들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어떤 기회도 주지 않기에.

그들에게 그런 세상은 ‘속으로 번연히 쾌가 그른 줄 알면서 얼렁뚱땅 거짓말이나 하는 유식한 분들이 정치를 하고, 사업을 하고, 신문을 내고, 교육을 파는 판’이다. 지금까지 그 판은 설령 ‘혁명’으로 세상이 뒤집어지고,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 흑이 백이 되어도 바뀌는 법이 없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결코 기회주의자가 아니기에 그들은 흑이나 백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반세기가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독고준이 말한 ‘사랑과 시간’은 아직도 대안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우려한 것처럼 사랑은 자기 집단만을 위한 광적인 에고(ego)로 변질되었다. 시간은 거꾸로 가거나, 되돌아갔다 오기를 반복했다. 권력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서슴없이 살생부를 만들고는 ‘칼의 노래’를 불렀다. 조국과 민족을 내건 ‘개혁’에는 ‘복수의 피’가 어른거렸고, ‘탐욕’의 악취가 풍겼다. 그 피와 악취를 숨기기 위해 정권은 온갖 권모술수와 부정을 동원했다.

어디 그뿐이랴. 그들의 ‘주구(走狗)’들은 진실과 양심을 팽개치고 과장과 궤변과 강변의 천박한 춤을 췄다. 문화예술인들까지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에 올려 동지와 적으로 구분해 배척하고, 인격적 모욕까지 주었다. 이러니 역사 바로 세우기도, 문화융성도 공허하고 역겨울 수밖에. 블랙리스트에는 독고준처럼 정말 집단이 아닌 개인, 밀실이 아닌 광장의 자유로운 영혼인 ‘회색인’들도 있다. 빨강, 파랑 노랑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픽사베이

‘어느 편이냐’고 묻지 마라

흑과 백만이 존재하고, 흑과 백은 결코 섞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부터 한다. “너는 어느 편이냐”고. 그래서 내 편이면 흰 칠을 하고, 아니면 검은 칠을 해버린다. 편 가르기를 통해 정체성을 강요한다. “어느 편도 아니요”나 “양편 모두 입니다”는 ‘흑’으로 의심하거나 간주한다.

역사는 이념의 대립, 이분법 속에서 많은 회색인, 실제로는 아무런 색깔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낮에는 백, 밤에는 흑이 되기를 반복했지만 결국 ‘회색인’이란 낙인으로 양쪽으로부터 죽음을 당했다. 지금도 세상은 늘 흑과 백이 서로 자리를 바꿀 뿐, 회색이 설 자리는 없다.

회색은 흑과 백이 자연스럽게 섞여 만들어진다. 그 정도에 따라 조금 더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한다. 불가에서 회색은 빛을 반사하는 백과 그 빛을 흡수하는 흑의 조화로 ‘중용’을 상징한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흑과 백의 조화를 소중히 하는 곳, 이분법과 집단논리로 개인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은 곳에 아름답고, 다채롭고, 풍성한 삶과 문화예술이 있었다.

흰색만으로는 아무 것도 그릴 수는 없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캄캄함 어둠(흑)에서 벗어나 밝은 빛(백)속으로 나와도 그림자는 있어야 한다. 나만의 문화가 아닌 국민 모두의 문화가 숨 쉬는 대한민국을 위해 어쩌면 필요한 것은 ‘그레이 리스트’일지 모른다. 회색, 나아가 세상의 모든 색을 소중히 하고 적극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문화예술의 진정한 ‘탕평’인지도 모른다.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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