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전송]

“굴속이야. 들어갈수록 깜깜해. 나가는 문도 없어.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아. 머리와 발바닥이 붙어버린 것 같아.”

©픽사베이

여고 동창 J의 SOS.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혼잣말 같은 웅얼거림만 반복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터널이야. 굴이 아니야. 터널이 긴 것뿐이라고.”

어머니 돌아가신지 일 년,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그것도 그냥 무심히 보는 게 아니라, 샅샅이 훑는다. 길을 가다가도 조금만 구름 모양이 특별하다 싶으면 저절로 멈춰지는 발걸음, 혹시나 내가 못 보고 있나 제자리에서 전후 사방으로 뱅뱅 돌며 하늘을 살핀다. 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저 하늘 어딘가에 계실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의 숨결과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까지 하늘 아래에서 그렇게 나는 느끼고, 듣고, 만지며, 사는 동안 가장 힘든 일 년을 지나왔다.

무심히 흐르다 또 무심히 모아지는 구름도 내겐 어머니의 몸짓 같고, 새벽과 대낮과 일몰의 하늘 색깔도 역시 내겐 어머니가 보내는 전언 같아 그때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당연히 스마트 폰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 풍경이 저장되어 있다. 프로필 바탕 화면 역시 어머니가 계신 용미리 추모의 집 앞 하늘이다.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보낸 대신 하늘을 온통 내 것으로 하면서 어머니 슬하에 살고 있는 나를 느껴왔다. 저 하늘이 내 머리 위에 있는 한, 내가 저 하늘 아래에 있는 한, 나는 어머니를 잃은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말이다.

©픽사베이

그런데 오늘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구름 한 점 없이, 정말 파래도 너무 파란, 그래서 하늘 전체가 짙푸른 빛깔의 거대한 블랙홀 같은 모습에 사로잡혀 있던 시간이었다. 전화 벨 소리에 깜짝 놀랐던 것도 내 온몸과 마음이 저 하늘 어딘가로 향하는 문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강한 느낌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하늘을 통과하면 분명히 어머니가 계신 세상이 있다는 확신이 든 날이기도 했다.

태어난 게 삶의 입구로 들어온 거라면, 죽음은 다른 세상으로 가는 출구라는 생각도 뒤따랐다. 땅이 생명의 입구라면 하늘은 또 다른 생명을 얻는 출구다... 처음으로 사람이 죽으면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하는 항간의 말이 앞뒤좌우가 참인 진실로 다가왔다. 죽음이라는 출구를 통해 하늘 바깥의 어느 세상에 당도하는 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인생이고, 하늘 바깥의 어느 세상이 ‘저 세상’이라면 지금 내 어머니는 그곳에 가 계신 것이다. 길고 무거웠던 슬픔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 아래 모든 것이 터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터널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들어간 곳이 있으면 나가는 곳도 있다. 아무리 긴 터널이라도 계속 걷다보면 끝나는 지점이 나오게 돼 있다. 아무리 깜깜한 터널이라도 걷다보면 출구가 가까워지므로 희미하게라도 빛이 들어오는 걸 그래서 느낀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진다. 그러나 굴은 다르다. 끝나는 곳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그 어떤 열린 공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들어갈수록 깊고 깜깜한데다 미로로 이어진다. 돌아 나오려 해도 첫 지점조차도 못 찾기 일쑤다. 당연히 들어갈수록 어둠과 막막함에 갇힌다. 출구가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힘든 시절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는 어르신들의 무용담을 들은 기억을 누구든 갖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든 시기, 힘든 상황도 끝나는 출구가 있어 지금은 다른 시기, 다른 상황으로 자신이 편입되었음을 뜻한다. 그런 자에게서 느껴지는 안도감과 자신감은 길고 어두운 시절을 지나온 자일수록 더 빛난다.

그분들이 예사로 하시는 그 말씀을 통해서도 삶이란 터널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지나왔다’는 건 ‘거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계속 걸으면 나가는 문이 또 있더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어둡고 답답하고 악취 나는 공간이지만 열심히 사력을 다하여 걷다보면 끝이 보이는 환한 곳이 반드시 나온다는 희망의 전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픽사베이

지금 굴속에 있다는 친구에게 긴 메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다. 오랜 지기이니만큼 나는 그녀가 지나온 길에서 마주쳤던 불행이나 아픔의 고비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거쳐 온’ 그 고비들을 들추어 펼쳐 보여줄 때가 아닐까 한다.

-그것도 지나왔잖아. 그때도 나가는 문이 있었잖아. 길고 어두웠던 만큼 출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더 환하고 눈부셨잖아. 다 터널이었잖아. 우리가 태어나서 열 살, 스무 살, 쉰 살, 이렇게 나이를 먹는 것, 태어날 때 겨우 삼십 센티 자 정도로 땅으로부터 가깝던 키가 일 센티, 십 센티, 일 미터 이렇게 하늘에 가깝게 위로 자라는 것, 살아오면서 있었던 많은 일들이 과거의 일로 회상되는 것, 그거 다 나가는 문이 있는 터널이기 때문에 진행된 거야. 굴이었다면 들어왔던 데로 다시 돌아나가야 하거나, 길조차도 잃어버려 갇혀만 있었겠지. 그랬다면 우린 벌써 화석이 되었거나 그조차도 사라진 잠깐의 그 무엇이 되고 말았을 테고. 겪어야 할 일이 많다는 건 아직도 네가 걸어야 할 터널이 길다는 거 아닐까? 이제 점점 조금씩 밝아질 거야. 터널엔 출구가 반드시 있잖아. 너 알잖아? 그래서 지금 너 살아있는 거잖아? 죽음도 굴이 아닌데 어떻게 삶이 굴일 수 있어? 다 터널이야. 그냥 걸어. 걸으면 나와. 터널은 끝난다고. 우리 이미 나이만큼 많은 터널 지나와 봤잖아?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조용하고 깊고 너무도 맑은 가을 하늘이 거실 창문을 열고 천정 가득히 들어오고 있다.

©픽사베이

삶은 터널이다. 절대로 굴이 아니다. 터널 저쪽 세상에 어머니가 있다. 이 짙고 붉은 그리움의 터널도 충실히 겪고 견뎌내면 언젠가 기쁜 해후가 출구 저쪽의 세상에 마련되어 있으리라.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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