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자칼럼]

[오피니언타임스=묘심화] 2011년 봄이었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추신수 선수의 지인들이 자비정사를 찾아왔다.

2009년 7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故) 조성옥 감독의 동생과 두산 베어스 관계자 분들이었다. 조성옥 감독은 추신수 선수의 부산고 스승이었다. 조 감독의 동생은 “제 꿈에 돌아가신 형님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말을 들은 추신수 선수가 천도재를 마련해 스승님을 좋은 곳으로 모시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나는 스승을 생각하는 추신수 선수의 마음에 크게 감동했다. 세상이 험악해져 스승의 은혜는커녕 스승의 권위가 추락하고 교권이 침해당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지는 요즘 세상에 고인이 된 스승을 위해 기도를 올리겠다는 제자의 마음이 여간 기특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자비정사에서 고(故) 조성옥 감독을 위한 영산재(靈山齋)가 치러졌다.

영산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보살에게 재를 올려 그 넋이 정토(淨土)나 천계(天界)에서 태어나도록 기원하는 천도재(薦度齋)의 일종이다. 영산재는 법화사상(法華思想)에 따라 석가모니불이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적으로 설정하고 지내는데, 의식을 행하는 장소가 일시적으로 영산회상이 되어 이곳에서 석가모니의 설법을 들은 영혼이 극락왕생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재는 대개 야외법회(野外法會)로 진행된다.

11월의 바람은 차가웠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고 북한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했다.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엄숙했다. 유족과 함께 손아섭(롯데) 윤지웅(넥센) 손용석(롯데) 김태군(LG) 선수 등 고인의 제자와 후배들이 참석해 고인의 천도를 빌었다.

목탁 소리와 함께 징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추신수 선수가 고인의 영정을 들고 행렬을 이끌었다. 고인의 영정이 불단에 이르고 추모행렬이 도열한 가운데 나는 고인을 위한 기도문을 낭독했다. 고인의 생전 약력이 소개되고, 눈시울이 붉어진 추신수 선수가 고인의 영정 앞으로 나아가 추모사를 읽어 내려갔다.

부산고와 동아대를 졸업한 고 조성옥 감독은 1982년 야구 대표팀으로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에 기여했고, 프로야구 롯데에서 1984년과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모교인 부산고에서 추신수와 백차승 손아섭 장원준 정근우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러나 48세 때인 2009년 7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 팬들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날 당시 미국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추신수 선수는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돌아가신 은사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한 마음이 컸었고, 2009년 귀국길 인터뷰에서 “스승인 조성옥 감독의 죽음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추신수 선수는 영산재가 시작되기 전부터 슬픈 표정이었고, 추모사를 읽으면서 끝내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터져 나오는 울음 때문에 추모사가 중간 중간 끊어지기도 했다. 함께 자리를 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고, 나도 감정이 복받쳤다.

추신수 선수는 의식이 끝난 뒤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정말 마음이 아프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 아직도 핸드폰에 감독님 번호가 있는데, 통화 버튼을 누르면 받으실 것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감독님은 참 행복한 분이라 생각이 든다. 지인과 제자들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으니 편히 가실 것으로 생각한다. 제자들이 감독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좋은 제자들을 많이 키워냈으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갈수록 각박해져가는 요즘, 무거운 주제의 뉴스들을 보며 불현듯 고 조성옥 감독의 영산재가 떠올랐다. 추석 연휴에만 반짝 안부묻기에 그치지 말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평소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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