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무수리는 궁중에서 청소나 물 긷는 일을 하던 신분이 낮은 여성을 일컫는다. 한자로는 수사이(水賜伊)라고 쓴다. 무수리들이 궁궐에서 머물던 곳은 수사간(水賜間)이라고 불렀다. 무수리는 원래 몽골말이라고 한다. 고려 말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실에 들어오면서 몽골의 풍습과 언어가 따라 들어왔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무수리는 숙빈(淑嬪) 최씨일 것이다. 숙종의 후궁으로 훗날 영조의 어머니가 된 인물이다. 최씨가 궁에 들어간 것은 일곱 살 때라고도 하고, 열두 살 때라고도 한다. 인현왕후를 섬기며 궁궐생활을 했다니,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가 폐출된 이후 희빈 장씨로부터 모진 구박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영조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최씨는 1693년(숙종 19) 왕자를 임신하여 숙원(淑媛)이 됐다. 태어난 왕자는 두달만에 죽었지만, 최씨는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한 이듬해 또다른 왕자 금을 낳는다. 연잉군 금이 결국 임금으로 등극하니 곧 영조다. 최씨는 숙의(淑儀)와 귀인(貴人)을 거쳐 1699년(숙종 25) 정1품의 숙의에 올랐다. 최씨는 1718년(숙종 44)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것에 대한 영조의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영조와 최씨의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도 곧잘 쓰였다.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어머니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廟)라 불렀다. 영조는 어머니 사당을 1744년(영조 20) 육상묘(毓詳廟)로, 1753년(영조 29) 육상궁(毓詳宮)으로 각각 지위를 높였다.

영조는 당시 경기도 양주 땅에 쓴 어머니의 무덤 역시 1744년 소령묘(昭寧墓), 1753년 소령원(昭寧園)으로 격을 올렸다. 앞서 영조가 어머니 사당으로 점찍었던 장소는 자신의 잠저(潛邸)인 창의궁(彰義宮)이었다고 한다. 잠저란 즉위하기 전 머물던 집을 말한다. 창의궁은 경복궁 영추문 서쪽인 지금의 종로구 통의동에 있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왕이 거처하던 곳에 그 어버이인 사친(私親)의 사당을 둘 수 없다고 반대했고, 영조는 결국 경복궁 북서쪽에 있는 청릉군의 168칸 집을 사들여 이듬해 숙빈묘를 조성하도록 한다. 영조는 1726년 숙빈묘 주변에 대한 정비사업도 벌였다. 이웃한 초가들을 철거하는 한편 한성부로 하여금 따로 땅을 내주어 이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숙빈묘가 들어선 곳은 지금의 청와대 서쪽 칠궁(七宮) 자리다. 숙빈묘, 곧 훗날 육상궁은 1908년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이 더해져 육궁(六宮)이라 하다가 1929년 덕안궁이 옮겨지면서 칠궁이 됐다. 저경궁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의 생모 인빈 김씨, 대빈궁은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연호궁은 영조의 맏아들로 세자 시절 세상을 떠난 추존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사당이다.

선희궁은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 덕안궁은 영친왕의 생모 순헌귀비 엄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왕비의 지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왕을 낳은 어머니들의 사당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이 곧 칠궁임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즉위 직후부터 숙빈 최씨를 기리는 작업에 적극적이었지만, 어머니의 지위를 자기 손으로 높이는 것에는 부담이 적지 않았다. 즉위 30년이 다 되어서야 어머니의 사당을 궁(宮), 무덤을 원(園)으로 가까스로 격상시킬 수 있었던 것도 신하들의 곱지 않은 눈초리 때문이었다.

1753년 6월 25일 영조는 숙빈 최씨 사당의 격을 높이면서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추증한다. 영조는 그 절차의 하나인 죽책문(竹冊文)을 대제학 조관빈에게 지으라고 명했지만, 조관빈은 “국가가 대소 책문은 종가의 대를 잇는 비빈(妃嬪)이 아닌 이런 경우는 없었다”면서 거부한다. 격노한 영조는 조관빈을 함경도 삼수에 위리안치하고 좌의정 이천보에게 대신 짓도록 했다.

소령원 조성 또한 영조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영조는 같은 해 7월 11일 정자각을 세우고 9월 13일 영조가 직접 행행(行幸)해 원의 완성을 고했다. 제사를 지내는 중심 건물로 무덤 앞에 짓는 정자각은 원 이상의 무덤에만 세운다. 소령원을 완성한 날은 영조의 탄신일이라고 한다. 신하들에게 숙빈 최씨를 국모(國母)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소령원 행행에서도 임금과 신하 사이 갈등이 빚어진다. 영조는 육상궁과 소령원에 갔을 때 절하지 않은 신하들이 있었던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영조는 결국 절을 하지 않은 대신과 신하들은 모두 파직하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이후 영조를 비롯한 역대 왕이 소령원에서 의례를 행할 때 신하들이 절을 하는 것은 공식적인 의례로 자리잡았다.

영조는 52년 동안 재위하며 18세기 조선을 중흥기로 이끌었다. 숙빈 최씨의 신분이 화제가 되는 것도 영조가 결코 예사로운 임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육상궁과 소령원은 흥미로운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훌륭한 스토리텔링 자원이다. 나아가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육상궁과 이제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속한 소령원, 그리고 숙빈 최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원찰로 소령원에서 가까운 보광사를 묶으면 의미 있는 역사 여행 코스가 된다.

문제는 육상궁을 포함한 칠궁과 소령원 모두 상시 개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관람객이 칠궁을 찾으려면 청와대 방문 신청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경호경비 때문일 것이다. 소령원 역시 관람 신청을 먼저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보고 싶으면 언제나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중요한 역사 관광 자원을 사장시키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문화재당국이 원(園)급 무덤에 적지 않은 인력을 배치해 상시 개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조와 무수리 어머니의 스토리를 좆아 소령원을 찾았다가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탐방객은 결코 적지 않다. 칠궁의 출입 제한은 더더욱 생각해 볼 문제다.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칠궁의 문은 활짝 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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