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요섭의 동호지필] 가면 뒤 숨은 인간의 본성

[오피니언타임스=조요섭] 인간이란 과연 자격이 요구되는 존재인가. 윤리나 법, 문명 따위가 만들어진 지는 불과 수천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는 300만년 전에 등장한 것으로 확인된다. 태초의 아침부터 시작된 인간의 본성이 과연 제도에 의해 재단될 수 있는 것일까. 애초에 자격이란 것이 인간에게 적용될 만한 것일까.

나는 여태껏 살아오며 한 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다. 비주류라는 꼬리표가 이름 석 자보다 더 선명하다. 그러나 내가 비관의 영역에 가까이 있었다고 해서 쉽사리 염세주의적인 사고에 빠진 것은 아니다. 외려 도태된 비주류로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주류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던 환경이 지금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데 더 큰 작용을 했다고 할 것이다. 나는 무리를 이루어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커다란 모순 하나를 목격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인간성을 버리는 광경을 말이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저는 이런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교보문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인간이라는 자격의 해부다. 메스 같은 펜촉으로 인간을 해부했지만 붉은 선혈이 아닌 먹먹한 공기만 흘러나오게 만든다. 그것이 곧 우리를 향한 환기다. 이 책의 주인공 요조는 학교에서 오락부장과도 같은 역할을 자처하며 익살을 부리면서 자신의 피폐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누구나 페르소나(가면)를 가지고 살아간다. 요조도 마찬가지다. 그가 같은 반에서 가장 바보인 친구에게 거짓 얼굴이 발각되는 순간은 한 개인의 가면적 세계가 얼마나 나약한 것이며, 동시에 그 나약함이 삶에서 얼마나 큰 기저를 이루고 있는가를 낱낱이 폭로한다. 결국 요조처럼 가면이 벗겨진 우리는 그처럼 무력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후 도쿄로 건너간 요조는 술, 담배, 여자에 대해 알아간다. 특히 매춘부에게 안기어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푹 잠들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은 비로소 처음으로 긍정적인 서술이 나오는 대목이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옷을 입지 않고 헐벗은 몸으로 마주한 이는 인간도 여자도 아닌 미치광이처럼 느껴지지만 그런 매춘부에게서 요조는 마리아의 후광까지 보게 된다. 단순히 동질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일시적 구원의 형태로까지 변모되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저열하고 불결한 구원에 비릿함이 차오르기보다는 외려 머리가 맑아지고 안정감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패전 후 황량했던 열도의 상황에서, 되레 더 절망적인 소설을 써 내려간 오사무가 왜 그토록 일본 청년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억지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독자의 절망을 고스란히 인물에게 옮겨 오는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는 일말의 해소를 경험하게 된다. 절망 속의 요조에게 서사적 가학이 진행될수록 우리의 해방감은 증폭된다는 역설이 독자들마저 요조와 같이 죄의식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렇게 함께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겪는 일들이 허무하고 퇴폐적인 방황이 아니라 멀쩡한 정신으로서의 처절한 추적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자살에 실패한 요조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시즈코와 그녀의 딸은 작은 행복을 빚으며 사는 인물이다. 두 모녀와 함께 생활하게 된 요조는 시즈코의 도움으로 만화가로서 돈벌이도 하며 여느 범인(凡人)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지만 끝내 그들과 어울릴 수 없는 괴리감을 느껴 떠나고 만다. 결국 행복은 존재로서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지, 본질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오사무는 현현히 드러낸다. 자살과 행복이라는 극단의 두 가치를 서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새겨 넣은 채로 말이다. 실제 우리의 삶도 그렇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픽사베이

요조가 방황의 형태로 인간의 자격을 묻고 추적해 갈수록, 그 정의는 흩어지고 비워진다. 이 소설의 대단원은 아내 요시코가 폭력에 더럽혀지는 것을 요조가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는 분노라는 원초적 감정마저 배제한 채 그 광경을 방관한다. 이윽고 이 대목에서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격이 완전히 무(無)로 수렴되는 것이다. 실존한다고 믿던 자격의 부재를 목격하자, 그는 더 이상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린 것이다. 자격에 미치지 못했기에 인간임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규정할 수 없었기에 내리는 존재 부정, 스스로에게 내리는 인간 실격을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오사무는 자격이란 것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실격을 내린 것이다. 그는 스물일곱의 요조를 영원으로 남겨놓고 본인마저 영원으로 떠났다. 네 차례의 자살 미수와 한 차례의 성공.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영원으로 새긴 작가의 한 줄짜리 소개글이다.

소설에서 이윽고 살아남는 요조와 현실에서 자살한 작가 오사무, 과연 누가 진실로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지는 쉬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인간으로서 실격 당한, 혹은 스스로를 실격한 그는 힘겹게 헤매고 고뇌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도 가장 인간답게 느껴진다는 모순은 비단 비약적인 감상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그’가 살아남은 요조인지 죽어버린 오사무인지도 특정할 수 없다. 즉 실격이라는 결정 아래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종국적 귀결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결국 이 소설은 지질한 고백 끝에 홀연히 질문 하나를 던지고 끝난 것이다. 이 무책임한 책을 덮은 나는 존재로서, 그 질문 앞에 헐벗은 단신(單身)으로 서게 되는 공포를 느꼈다.

나는 살아 있나요, 나는 인간이 맞습니까.

도서관에서 책을 다 읽고 나와 지하철역으로 들어섰다. 승강장에 서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표정이 읽히지 않는다. 열차가 들어온다. 뭇 사람들이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선다. 유리창에 비치는 수많은 얼굴들께 묻는다.
당신은, 자격이 있습니까. 

 조요섭

어쩌면 미학이란 것은 노동자에게 주어진 빵과 우유보다 훨씬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느낀 이후로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려 하는 사람입니다.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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