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오피니언타임스=이호준] 어느 도시로 강연을 하러 간 날이었습니다. 조금 늦기는 했어도 서울까지 올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일부러 하루 머물기로 했습니다. 그 도시 인근에 젊은 후배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낙향의 이유는 기억에 없던 터였습니다. 그의 고향이 제가 강연할 곳과 멀지 않다는 것도 본인의 전화를 받고서야 생각났습니다. 공교로운 일치였습니다.

그가 전화를 한 것은 강연 며칠 전이었습니다. 쭈뼛거린다고 하나요?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달리 목소리에는 망설임 같은 게 묻어 있었습니다.
“형님, 이곳저곳 다니실 때 저 사는 곳에도 한 번 들러 가세요. 여기 참 좋습니다. 뵙고 싶기도 하고요.”
“아, 그래? 마침 며칠 뒤에 그쪽으로 갈 일이 있는데 가서 연락할게. 그런데 별 일 없는 거야? 왜 느닷없이 고향에….”
“예… 그게, 사실은 우울증 때문에 내려왔어요. 조용한 곳에서 쉬는 게 좋겠다고 권해서….”

우울증? 그러고 보니 이 친구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때문에 가슴에 있는 이야기도 들어주고 술도 함께 마셨던 게 2년 쯤 전이었습니다. 그 뒤로 별 말이 없길래 떨쳐버린 줄 알았는데, 결국은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지경까지 간 모양입니다.

©픽사베이

저는 우울증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가끔 우울 속으로 빠져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일과성이라서 큰 고통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거지요. 물론 흔히 나타나는 정신질환의 하나이며 ‘마음의 감기’라고 부른다는 사전적 의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또 대인 관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심한 경우 자살까지 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요. 그래도 제 자신이나 가족 중에 그렇게 심각한 경우가 없었으니 강 건너 불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이것저것 찾아보니, 우울증이 나타났을 때 지속적으로 치료하지 않으면 6개월 이내에 25%, 2년 이내에 50~75%가 재발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발이 반복될수록 우울증이 유지되는 기간이 길어지고, 발생하는 간격은 짧아진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후배가 그런 경우였던 모양입니다.

강연을 마치고 만난 후배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중병을 앓는 환자처럼 생기(生氣)가 없었습니다. 외양으로 볼 때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조언이 그리 유용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저 모양까지 됐을까. 마주 앉은 내내 송곳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나이가 40 중반인데 아직 미혼입니다. 우울증이 도진 뒤로 제법 괜찮은 직장에서 스스로 퇴직했습니다.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늘 그만둔다고는 했습니다. 누군가를 딛고 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조직문화에 적응하는데 힘들어했습니다. 언제까지 직장생활을 할지 모른다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병원은 다니고 있는 거야?”
“얼마간 다녔는데, 지금은 그만 뒀어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요.”
“그게 스스로 판단할 일은 아닌데. 계속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게 좋지 않을까?”

그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습니다. 제가 볼 때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담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막막한 앞날 역시 우울증의 결정적 이유가 됐겠지요. 살벌한 조직문화에 대한 염증 때문에 다시 직장을 잡기도 어렵고, 그 정도 사회성으로 장사를 하는 건 더욱 힘들고, 그런 형편에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그러니 결혼도 포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 이 나라의 환경과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뭔가 정리 되지 않아서 그럴 거야. 딱히 매듭지어지는 게 없으니까. 사방이 절벽인 곳에 갇힌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 때 스스로가 무엇에 답답해하는지 순서대로 적어봐. 그리고 가장 쉬운 것부터 하나씩 풀어나가는 거지.”
제 스스로 생각해도 어줍지 않은 조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와 헤어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도 가슴은 돌덩이를 얹어놓은 듯 무거웠습니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면 후배와 같은 증상을 가진 환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국내 우울증 환자는 5년 새 5만4127명 증가했다고 합니다. 진료를 받은 적이 있는 환자 중에 40대가 13.8%(8만8799명), 30대가 11.3%(7만2717명), 20대가 9.9%(6만3336명)로 젊은 층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20대 남성 환자의 경우 5년 사이 44.2%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예 진료를 받은 적이 없거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이들을 생각하면 이 숫자 역시 극히 일부겠지요.

숨이 턱턱 막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현실. 그런 환경이 우울증 환자나 예비 우울증 환자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지. 멀쩡한 것처럼 보여도, 우리 모두 집단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야말로 함께 고민하고 대책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지, 스스로 자꾸 무거워졌습니다.

 이호준

 시인·여행작가·에세이스트 

 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문명의 고향 티크리스 강을 걷다>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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