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겠다.” 모든 정부가 이렇게 말했다. 심지어 군사독재 정권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한 번도 간섭 없는 지원이란 없었다. 자신을 욕하고, 화살을 쏘아대는 문화예술은 아예 싸늘하게 외면하거나 억눌렀다.

아무런 간섭도 안 받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란 흔치 않다. 어쩌면 세상에 그런 돈은 없을지도 모른다. 부모자식 간에도 경제적 지원에는 간섭이 따른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부모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려면 성인이 되자마자 경제적으로 독립부터 하라고 말한다. 정부의 지원금은 국민이 낸 세금이다. 그것을 엉뚱한 곳에 쓰거나 낭비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살펴봐야 한다. 문제는 돈의 주인인 국민이 아닌 정권이 마치 자기 것인 양 멋대로 생색내고, 나누고, 간섭하고, 통제하는데 있다.

©픽사베이

간섭과 통제, 문화예술의 ‘독’

정부의 지원은 궁극적으로 국가와 국민의 살찌우고 행복하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다. 예술인들의 삶을 돕고 창의성을 키워 다양하고 풍성한 문화예술이 숨 쉬는 나라, 문화로 행복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문화예술에 어떤 간섭과 통제부터 없어야 한다. 문화예술이야말로 가장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야 창의력과 상상력이 살아나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만 다양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가진다. 사람들은 그런 문화예술을 만들고 누리기를 원한다.

역사를 돌아보면 통제와 억압이 있는 곳에 문화와 예술도 죽었다. 그래서 문화예술은 어떤 타협이나 순응도 거부하는 용기있는 ‘독립군’이 되기도 한다. ‘독립영화’가 그렇다. 작고 가난하지만 독립영화에는 상업영화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주제나 소재에 거침이 없다.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비판적 시각, 과감한 실험정신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개성적으로 표현한다.

문화예술이 원하는 것은 이런 예술혼과 예술의 가치를 소중히 지키고 가꾸는 ‘지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약이 아닌 독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시인이 돈 몇푼 때문에 영혼을 팔아 누군가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찬가’를 지었다면 그것은 시도 아니다. 정부 지원금을 받으러 눈치 보며 상영하고 싶은 영화를 포기한 영화제는 ‘축제’가 아니다.

지원이 ‘내 식구 챙기기’인가

역대 모든 정부가 ‘나름대로 원칙을 가지고 문화예술에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다. 그런데 문제는 ‘나름대로’이다. 자기 사람들, 자신들과 같은 색깔의 문화예술에만 그렇게 했다. 명분은 그럴 듯했다. 어느 정부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문화예술의 균형회복, 어느 정부는 비정상인 문화예술의 정상화라고 했다. 물론 그 균형과 정상화의 저울추는 자신들 멋대로 정한 것이었다.

진짜 목적은 문화예술까지 자기 입맛에 맞는 것들로 채우려는데 있었다. 알아서 장단을 맞춰주니 그런 지원은 굳이 간섭할 이유도 없었다. 설령 이따금 못마땅해 간섭하고, 통제를 해도 관심과 애정, 동지적 유대로 받아들였다. 그것을 위해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블랙리스트도 만들고, 화이트리스트도 주저 없이 만들었다.

그뿐인가. 자기식구 챙기기를 위해서라면 제도와 절차까지도 맘대로 무너뜨렸다. 만에 하나 자기 사람이 아닌,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 대상으로 뽑히기라도 하면 가차 없다. 어느 정부, 문화예술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아무리 공정하고 객관적이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효화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곤 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문화예술계가 ‘복수’의 춤을 추는 이유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해 영화 전공 학생들과 오찬 간담회를 하고 있다. ©청와대

‘조건 없는 선택’부터

지원에 앞서 정부가 지켜야 할 것은 ‘조건 없는 선택’이다. 내 사람만 골라놓고는 균형이니 정상화이니 하는 것은 명백한 편파이고 차별이다. 그래놓고는 간섭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부정의 묵인이고, 야합이다. 그동안 정권에 따라 사람만 바뀌었지 이런 적폐가 반복되어 왔다. 말만 ‘공정’했지, 어느 정부에서도 공정한 선택이나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를 잘 알고 있기에 문재인 대통령도 부산영화제를 찾아 “힘껏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겠다”고 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로부터 지원축소와 압박에 시달려온 부산영화제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지원전반에 대한 대통령의 약속이기도 하다.

여기에 꼭 한 가지를 보태야 한다. 간섭뿐만 아니라 오로지 문화의 본질인 창의성과 다양성만을 보는, 한풀이나 편 가르기가 아닌 ‘조건없는 선택’이다. 그것까지 가지고 있어야 문화예술지원에서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질’ 것이다. 문화가 제대로 숨을 쉴 것이다.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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