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현대인 고전 읽기]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

[오피니언타임스=김호경] 늦은 저녁, 지하철 3호선 전철에 탔을 때 백인 남자가 앉아 있고 그 옆자리가 비어 있다면 당신은 그 옆에 앉을 수 있는가? 어쩌면 앉을 것이다. 만약 흑인의 옆자리가 비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앉을 수 있는가? 어쩌면 앉지 않을 것이다. 앉았다 해도 “나는 백인과 흑인을 차별하지 않아”라고 마음속으로 외칠 것이다. 그 외침 자체가 흑백의 편견이다.

백인과 흑인이 나란히 앉아 있으면 우리는 백인이 더 교양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 미녀의 말은 신빙성이 높고, 추녀의 말은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한다. 대학 교수는 책을 많이 읽었을 것이라 지레짐작한다. 모두 편견에 불과하다.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번역본은 박경민 판본을 권한다. 이미 절판되었으므로 헌책방에서 구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김호경

편견은 삶의 불편한 동반자

아주 오래 전인 1980년대 초 어느 날 ‘주말의 명화’에서 우연치 않게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흑백TV에서 상영된 영화는 흑백영화였다. 컬러영화였을지라도 어차피 흑백으로 방영되었을 것이다. 제목은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 무척 재미있고, 감동 깊은 영화였다. 7살 여자 주인공 스카웃이 10살 오빠 젬과 함께 빈 타이어 속으로 들어가 떼굴떼굴 구르는 장면, 고목나무 옹이구멍에 장난감이 들어 있었던 장면, 핼러윈 가면무도회가 끝난 후 탈바가지를 쓰고 집으로 돌아오던 장면 등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명작이었다.

가장 깊은 기억은, 억울한 누명을 쓴 흑인청년이 스카웃의 아버지이자 변호사인 에티커스의 활약으로 자유의 몸이 되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래서 내 나름으로 영화의 주제를 ‘흑백갈등’과 ‘아름다운 승리’로 정의내렸다. 하재봉의 시 <유년시절>을 처음 읽었을 때 문득 이 영화가 다가온 까닭은 유년의 잃어버린 낭만이 그리웠기 때문이리라.

일곱 개 빛의 미끄럼틀을 타고 새알 주으러 쏘다니던 강안에서
무수히 많은 눈물끼리 모여 흐르는 강물 위로 한 움큼씩 어둠을 뜯어내버리면
저물녘에는 이윽고 빈 몸으로 남아 다시 갈대숲으로 쓰러지고요.

5년 쯤 시간이 흘러 그 영화가 <To Kill A Mockingbird>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영화의 제목도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이 아니라 <앨라배마 이야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작가가 여자라는 사실은 의외였는데, 책을 읽은 후에야 ‘당연히 여자’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하퍼 리를 남자로 생각한 이유는 남북전쟁 시기에 남군 총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E. 리(Robert E. Lee) 장군이 떠올라서였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소설 한 편을 선정해 교과서 삼아 1년 동안 탐독하고, 토론하고, 독후감을 제출한다고 한다. 그 교과서로 선정되는 소설 중 하나가 <앵무새 죽이기>이다. 흑인 노예의 고통을 다룬 명작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아닌 이유는 무엇일까? 남북전쟁을 무대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아닌 이유는 또 무엇일까?

어쩌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표방하는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현대 미국에서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흑백갈등이 아닌 백백갈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은 스칼렛이고,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은 스카웃이라는 점, 작가는 똑같이 여자이고, 두 작품 모두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무대는 조지아 주와 앨라배마 주인데 두 주는 남동부에 나란히 붙어 있다.

내게 사냥용 총이 있다면?

이 소설에는 모두 32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앨라배마 메이컴 마을에 사는 주인공 스카웃, 오빠 젬, 아빠 에티커스, 정체를 알 수 없는 옆집 아저씨 부 래들리, 이웰가의 딸 마옐라, 그녀를 강간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흑인 청년 톰 로빈슨....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에서도 흑인은 톰(Tom)이다. 흑인은 가장 흔한 이름을 지녀야 할 숙명을 지닌 것일까?

2차대전 영화를 유심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요소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등장인물이 대부분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는 흑인병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등장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관객이 알지 못할 만큼 극소수이다. 2016년 개봉한 <핵소고지>에서도 흑인병사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반면 베트남전 영화에는 흑인이 다수 등장한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가장 친했던 동료 벤자민 버포드 부바 블루는 흑인이었다. 1945년에서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흑인들은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을까?

영화 <앨라배마 이야기>를 보았을 때 나는 영화의 주제가 흑백갈등(인종차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 ‘편견에의 도전’으로 수정했다. 편견을 깨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당신이 메이컴 마을에 사는 백인이라면 “톰 로빈슨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사냥용 총이 있다면 앵무새를 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이 구절을 기억하라.

앵무새는 노래를 불러 우리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축내거나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만들지는 않아. 그저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러주지. 그래서 앵무새를 죽이면 죄가 되는 것이지.

‘앵무새를 죽이면 죄가 된다’는 말은 ‘선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면 죄가 된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죄는 편견에 굴복하는 것이고, 진실 앞에서 침묵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7살 스카웃을 통해 그 진리를 들려준다.

* 더 알아두기

1. 작가 하퍼 리는 1926년 미국 앨라배마 먼로빌에서 태어나 2016년 사망했다. 그녀는 평생에 걸쳐 사실상 단 한편의 소설을 썼으며(1960년) 그 작품이 현대 고전이 되었다. 비슷하게 J.D 샐린저 역시 <호밀밭의 파수꾼>(1951년) 단 한편의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2. 1992년 ‘도서출판 한겨레’에서 초판이 나왔을 때 번역자 박경민은 “앵무새는 기쁨과 양심의 상징”이라 말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mockingbird는 (다른 새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흉내지빠귀’가 정확한 뜻이다.

3. 미국 사회를 가늠할 수 있는 소설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T.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D.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이 있다. 덧붙여 E.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읽으면 미국 문학은 정리된다. 조금 더 시간이 있다면 어윈 쇼의 <야망의 계절>(Rich Man, Poor Man)도 독서 목록에 추가하기 바란다. 전쟁 소설로는 노만 메일러의 <나자(裸者)와 사자(死者)>가 걸작이다.

 김호경

1997년 장편 <낯선 천국>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여러 편의 여행기를 비롯해 스크린 소설 <국제시장>, <명량>을 썼고, 2017년 장편 <삼남극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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