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관의 모다깃비감성]

[오피니언타임스=신명관] 우리는 흔히 인사치레로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한다. SNS에 새로 올라온 사진을 보고 서로의 안부를 물은 뒤 “예뻐졌다, 멋있어졌다”며 조만간 만나자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얼마 전 그 말들을 모두 조롱하는 듯 누군가가 트위터에다 이런 말을 올렸다. ‘그렇게 (언니/오빠)는 (예뻤/멋졌)고 그 둘은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 전 추석에 나는 아는 선배에게 안부인사를 보냈고, ‘건강하고 잘 살고 있다가 한 번 볼 수 있기를!’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답장을 받고 나서 든 생각은 ‘담백하다’였다. 삼사년 전부터 만나자는 소리를 곧잘 해왔지만, 결국 정말로 만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하는 대표적인 세 가지의 거짓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악을 변호하기 위해 남에게 하는 기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숨기는 은닉, 그리고 진심을 담지 않은 빈말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씁쓸한 거짓말이 빈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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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보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시대가 왔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고객님”, 축복의 말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반성의 말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말들. 감정이 담겨야 하는 말들은 언제부턴가 겨울철 찬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처럼, 도로에 반쯤 찢어져 나부끼는 정치인들의 공약들처럼 흔해빠져버렸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사람들의 말까지 불신하고, 내가 꺼내는 말이 얼마나 의미가 큰지도 모르는 상황이 온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한 친구일거야. 나 이제 담배 끊었어. 자기만을 평생 사랑할게. 너 왜 이렇게 예뻐졌니 얼굴 좀 보자” 듣기엔 정말 좋은 말들이지만 지켜지는 것들은 별로 없다. 덕분에 남산타워의 직원들은 커플들이 매달아놓은 사랑의 자물쇠를 오래된 것부터 정기적으로 쳐낸다고 한다. 어차피 다시 찾아오는 커플들은 거의 없으니까. 내 지인 중 하나는 남산타워에 건 자물쇠만 세 개였다. 서로 다른 여자친구의 이름이 적힌.

건네는 말들이 지켜지지 않는 순간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준다. 내가 한 모든 말들은 ‘빈말’이었다고 선언하는 꼴이 되니까. 진심으로 받아들인 만큼 아프다. 상처받기 싫어서 자기방어기제를 잔뜩 쌓아올린 사람들이 생기는 순간이다. 또한 알게 모르게 상대방뿐 아니라 내 스스로의 자존감을 떨어트리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다들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럴수도 있단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되는 거겠지.

그래서 누군가는 상대방에게 애초에 많은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해준 만큼 상대방이 돌려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기대를 적게 하면 작은 보답에도 감사하니 별로 바라지 말며 살자고. 전제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애초에 기대를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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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에 대한 정의를 해보자. 화가 났거나 서운해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준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그건 상대방이 자신에 대한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길 바라는 보상심리다. 그럼 그저 순수하게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하길 바래서 주는 것일까? 부차적인 문제다. 센스가 좋다면 가능하겠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준다고 해서 선물의 의미가 퇴식하는 것은 아니다. 선물은 그저 내가 좋아서 주는 것이다. 그 외에 아무것도 없다.

대가도 없고 목적도 없다. 그저 좋아서 준다. 온전히 내 몫이다. 좋아해준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애초에 주는 행위 자체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니체는 그래서 선물이란 주는 사람이 준 사실을 잊어버리고, 받는 사람이 받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선물을 주거나 받았단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그에 대한 보답을 주거나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생길 수 있고, 그 순간 선물은 더이상 선물(膳物)이 아닌, 선물(先物), 빚이 된다. 그래서 남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다.

물론 개인이 꺼내는 모든 말들은 개인의 이기심에서 나온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이 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던, 형식상으로 내뱉는 말이던, 혹은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해 하는 말이던 간에, 본인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말한 그 순간부터 이기심이다. ‘저는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요’라는 말 또한, ‘모두가 행복해지면 저 역시 좋으니까요’라는 말로 받아쳐진다.

다만, 누군가가 당신의 진심을 받아주기를 원한다면 이기심의 발로를 정직하게 사용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진심을 담고, 미안하다는 말은 미안하다는 진심을 담아. 선물이라는 건 주고 싶다는 진심 하나만으로. 이 사람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는 느낌은 숭고할 정도로 아름답다. 빈말들이 없어졌을 때만 피어날 수 있는 감정의 찬란함이 있을 것이다.

한 살 어린 후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은 40:60, 50:50 같은 거래가 아닌, 주는 만큼 받는 것뿐이라고. 100대 100이라던 그녀의 말은 내게 조금의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애초에 주는 만큼 돌아오길 바라는 그 순간부터 나는 아직 사랑할 준비가 안 된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아직도 진심을 온전히 전하는 연습중이라 글을 쓴다.
내 진심이 당신에게 편안함을 주길 바랄 따름이다.

 신명관

 대진대 문예창작학과 4학년 / 대진문학상 대상 수상

 펜포인트 클럽 작가발굴 프로젝트 세미나 1기 수료예정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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