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1

중학교 시절을 회상하노라니 가슴부터 먹먹해진다.

격동의 1960년대 초반, 4·19를 대구의 수창초등학교(壽昌初等學校) 5학년 때 보았고, 5·16은 초등 졸업반에 일어났었다. 극장 만경관(萬鏡舘) 옆 대구경찰서 네거리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그 토치카에서 철모 쓴 병사 여럿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행인들을 쏘아보던 삼엄한 현장모습이 떠오른다.

그 이듬해인 1962년에 대건중학교를 입학했으니 이로부터 대구의 북구 태평로 경부선 철도 너머에서 남산동 언덕까지 이후 3년을 줄곧 걸어 다녔다. 첫 돌 전에 어머니 잃고 대구로 옮겨온 이농민(離農民) 가족들은 아버지와 형님, 큰 누나까지 셋이 전매청 직원이었다. 그 인연으로 수창학교 뒤편 전매료(專賣寮)에서 여러 해를 살다가 대문이 유난히 크고 벽오동이 대문 옆에 우뚝 선 태평로의 한옥을 사서 이사를 했었다. 동네에서 우리 집 별칭은 ‘큰 대문 집’이었고 나는 ‘큰 대문 집 아이’였다. 그때 태평로에서 수창학교를 졸업하고 새로 진학한 곳이 대건중학교였다.

필자의 시 '숲의 정신'이 새겨진 수창초등 100주년 기념시비 앞에서 ©이동순
대구 수창 초등학교 ©이동순

입학식 날 가본 대건중학교의 모습은 낯설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과 유럽중세풍의 긴 회랑이 있는 건물들이 이채로웠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리 특별한 친근감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태평로에서 학교가 있는 남산동까지 걸어가려면 우선 경부선 철로부터 건너야 한다. 차단기가 있는 원대동에 주민들이 ‘후미키리(踏切, ふみきり)’란 일본말로 부르던 건널목이 있었지만 그곳은 한참 더 돌아가는 거리라 보다 가까운 샛길을 더 좋아했다. 그 일대의 주민들은 대개 그 샛길로 다녔다. 샛길 입구까지 철둑길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마구간이 있었고, 내 친구 인걸이는 마부아들이었다. 눈이 펄펄 오는 날 인걸이네 집 앞을 지나노라면 일을 나가지 못한 조랑말이 마구간에서 푸르르 내뱉는 콧김소리와 목에 달린 방울소리, 바닥을 툭툭 긁어대는 말굽소리가 들렸다.

행인이 많이 다니는 샛길에는 만화방, 구멍가게, 오뎅집, 참기름집, 연탄집, 솜틀집, 잡화상 따위가 있었고, 떡 방앗간도 하나 있었던 듯하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바로 오른편이 자갈마당 재래시장으로 이어진다.(지금 이 시장은 없어졌다) 왼쪽으로는 도원동 유곽(遊廓)과 전매청이 있었고, 자갈마당 삼거리(지금은 네거리)는 항시 오가는 행인과 차량들로 붐비었다. 도원동 쪽 큰길에는 동아극장, 소표 국수 공장이 있었고, 그 맞은편 쪽으로는 삼중당(三中堂) 백화점이 있었다. 소표 국수 사장 아들 K는 초등, 중학시절의 동기였다. 워낙 부잣집 아들이라 친하게 어울리지는 못했다. 삼중당이란 이름은 원래 식민지시절 북성로에 있던 ‘삼중정(三中井) 백화점’의 명성을 빌려온 다소 큰 잡화상점이었지만 백화점 규모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제 때 삼중정 백화점은 일본말로 ‘미나까이(みなかい) 백화점’이라 불렀는데 성씨에 가운데 중(中)이 들어가는 일본인 나까이(中井) 형제 두 사람과 나까에(中江), 여기에다 오꾸이(奧井) 등 4인이 공동출자를 해서 만든 곳으로 대구 북성로가 본점이었다. 미나까이는 그 공동출자자의 성씨에서 집자(集字)로 만든 명칭이다. 그 백화점은 개점 이후 사업이 불같이 일어서 서울과 일본 도쿄는 물론 만주의 신경(新京)까지도 지점을 둘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삼중정 백화점은 막을 내리고, 옛 일본인거리 북성로는 지금 남루한 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자갈마당 로터리에 예전의 위세를 본뜬 삼중당 백화점이 세워져서 그 시절을 기억하는 노년세대들에게 야릇한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늙은이들은 대구 북성로 거리를 지칭할 때 항시 ‘미나까이 골목’이란 말이 익숙한 듯 보였다. 그 삼중당백화점 앞은 버스주차장이라 늘 혼잡했다. 남산동까지 버스로 등교를 할 수도 있었지만 차비가 없어서 나는 항상 걸어 다녔다.

1930년대 대구북성로에 일본인이 세운 미나카이 백화점 ©이동순

2

골목길을 빠져나와 길 건너 동아극장 앞을 통과하면 바로 인교동으로 이어진다. 인교동 골목은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 이규환(李奎煥, 1904~1982)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규환 감독은 1932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흑백무성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 작품으로 제국주의 침탈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영상물을 만들어 식민지 겨레의 심금을 울렸다. 이 영화에는 전설적인 배우 나운규(羅雲奎, 1902~1937)와 월북한 여배우 문예봉(文藝峰, 1917~1999)이 각각 뱃사공 아버지와 딸로 출연했다.

한편 인교동 골목 입구에는 초등 친구 H가 살고 있었는데, 중학교도 같이 대건으로 진학하게 되어서 우리는 등교 길에 꼭 함께 만나 같이 가고, 하교 길에도 동반자였다. 그래서 유난히 친했고, 자주 어울렸다. H의 집은 홀어머니가 운영하는 철공소였다. 자주 친구의 어머니가 술에 취해 전축에 걸어놓은 LP음반을 듣다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았다. 일찍 남편을 잃고 과부신세로 험한 사업계에 뛰어들어 고달프고 힘겨운 사정인들 얼마나 많았을 터인가.

친구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 전축은 항상 내 차지였다. 초록색 전등이 산뜻하게 들어오는 전축은 외양이 우아하고 예뻤다. 남인수, 백년설, 고복수, 이난영, 황금심, 장세정, 이인권, 신카나리아, 송민도, 이해연, 남일연, 백설희, 백난아 등등 기라성 같은 옛 가수들의 음반이 거의 빠짐없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아 친구어머니의 가요사랑은 거의 광적이었다. 대부분 울면서 노래를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현재 내 옛 가요 레퍼토리 수 백곡의 대부분은 그때 익힌 곡들이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네 집에 들러 음반의 옛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나중에는 대학노트 두 권에다 재킷 뒷면의 가사를 모두 옮겨 적기까지 했다. 부잣집 아이들이 모차르트나 바하, 헨델,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서양클래식에 심취할 때 나는 한국의 옛 가요로 늪처럼 빠져들었던 것이다. 친구네 방은 철공소 2층, 난간에서 보면 전매청과 도원동 유곽 쪽이 환히 내다보였다. 그 창문 난간에 아슬아슬 걸터앉아 나는 친구에게 첫 담배를 배웠다. 그게 중학 2학년 무렵이었으리라.

다시 등굣길로 돌아가자.
친구네 철공소를 지나면 서성로 방앗간 골목이다.
그곳은 삼성의 창립자 이병철(李秉哲, 1910~1987)의 삼성상회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던 거리다. 북성로에서 서성로에 이르는 긴 구간의 그곳은 각종 철공소, 철재상, 공구상, 베어링, 선반 기계 등 온갖 철물과 관련된 업체가 즐비하게 펼쳐져 있던 곳. 언제나 쇠 깎는 소리, 긁는 소리, 자르는 소리, 비비는 소리, 두들기는 소리, 용접하는 소리 따위에다 노동자들끼리 자주 싸움질하는 소란까지 잠시라도 조용할 틈이 없던 지역이다. 미군부대에서 쓰고 버린 빈 드럼통도 이곳에 오면 반듯하게 자르고 두들겨 온갖 생활도구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길바닥은 어딜 바라보나 오래 쩐 기름때로 얼룩져 있고,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은 일꾼들이 낮술에 취한 불콰한 얼굴로 돌아다녔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이 일대를 ‘깡통도로’라 불렀다.

그 서성로 거리 입구에서 아버지가 방앗간을 하던 K라는 친구도 있었는데, 코끝에만 살짝 천연두 자국이 남아있는 새침때기였다. 별명이 ‘살짝곰보’였고, 검정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자주 토라지는 그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악동친구들은 K의 코가 콩멍석으로 엎어질 때 그리된 것이라 놀리며 깔깔대고 웃었다.

대구의 지명들은 특이하다. 북성로, 서성로, 동성로, 남성로 등의 지명들을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는데, 원래 대구읍성(大邱邑城) 시절에 성곽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그 성곽을 파괴 해체한 장본인이 바로 당시 대구군수를 지내던 친일매국노 박중양(朴重陽, 1872~1959)이다. 그는 침략의 원흉으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의 양자로 자처하던 자였다. 가련한 식민지백성들 앞에 항시 지팡이를 휘두르며 다녔으므로 ‘박작대기’란 별명으로 불렀다. 그가 이토와 대구의 일본 거류민단 측의 비밀스런 합작으로 대구읍성 파괴해체를 주도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성곽을 해체한 곳에 생긴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여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성곽 해체과정에서 나온 각석(角石)은 계성학교 본관을 지을 때 주춧돌, 밑돌로 가져가서 일부 썼고, 지금의 청라언덕에 있는 서양인 선교사 주택의 초석으로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해체 때에 나온 수천 소달구지의 흙과 자갈은 성 밖 서쪽지역의 저지대 상습침수지역으로 실어다 매립했다. 그곳은 성내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고여서 늘 습지를 이루었고, 미나리가 저절로 돋아서 ‘미나리깡’이라 불렀다. 바로 이곳에 대구읍성의 흙과 자갈을 쏟아 부어 매립을 했는데 그로부터 이름이 ‘자갈마당’으로 불렸다.

매립 초기에 대구 거주 일본인 이와세(岩瀨)란 자가 헐값에 불하를 받아 시작한 첫 사업이 창녀촌, 즉 유곽(遊廓)이었다. 대구 ‘자갈마당’이란 말에서 곧장 유곽을 떠올리게 되는 역사적 배경엔 이런 사연이 숨어있다. 이 매춘굴(賣春窟)은 식민지의 공창시대(公娼時代)를 거쳐 해방 이후 잠시 위축이 되었다가 곧 살아났다. 6.25전쟁과 더불어 엄청난 피난민들이 무작정 대책 없이 대구, 부산으로 밀려들던 시절, ‘자갈마당’은 다시 번성한 모습으로 확장되었다. 함경남도 원산 출생의 구상(具常, 1919~2004) 시인이 쓴 <초토(焦土)의 시>는 시인이 자신의 고향친구인 화가 이중섭(李重燮, 1916~1956) 등과 더불어 대구에서 피난살이하던 시절, 자주 보던 도원동 유곽풍경과 전쟁의 비극성을 다룬 시집이다.

대구 자갈마당 유곽촌 ©이동순

3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이야기가 자꾸만 다른 갈래로 흐른다.

친구네 방앗간이 있던 서성로 길엔 당시 달서천(達西川)이 흐르고 있었다.(지금은 완전 복개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달서천은 달성공원의 서쪽을 흐르는 하천이란 뜻이다. 앞산의 물과 대명동 영선못 쪽에서 흘러온 물줄기가 달서천을 이루고, 다시 팔달교 쪽의 금호강으로 합류해간다. 그 금호강은 낙동강으로 이어져서 더 큰 강물이 된다. 달서천 둑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서문시장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와 만나게 된다. 이 도로 부근 일대를 시장북로(市場北路)라 불렀다. 시장은 필시 대구사람들이 ‘큰장’이라 부르는 서문시장(西門市場)일 터였다.

시장북로 어름에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시인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1900~1929)의 집이 있었다. 식민지시대의 주소는 ‘대구부(大邱府) 서성정(西城町) 1정목(丁目) 103번지’ 그곳에서 고월은 대구의 친일부호였던 이병학(李炳學, 1866~1942)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고, 부친과 몹시 불화하였다. 고월의 부친은 아들이 대한제국 시절 통신원 하급주사로 시작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 일본을 위해 전심전력으로 헌신하는 친일경력을 두루 거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기를 소망했다.

고월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가 여럿 바뀌었다. 이병학은 여러 부인과 살면서 도합 21명의 자녀를 낳았다. 일본 교토중학을 다녔던 고월은 방학 때 대구 집으로 돌아와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부친에 대한 극도의 혐오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화(李相和, 1901~1943) 시인과도 비슷한 또래였지만 기질적으로 많이 달라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다. 방안에 자신을 스스로 유폐시킨 채 고월은 줄곧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만 빈 종이에 그렸다. 해가 저물면 집을 나와 찾아가는 유일한 곳이 남산동의 천주교 성모당(聖母堂)이었다. 고월은 성모당 풀밭에 한참토록 혼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기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다량의 수면제를 삼키고 젊은 시인은 한 많은 스물아홉의 생을 자살로 마감하게 된다.

당시 나의 등굣길은 고월 이장희 시인이 다니던 산책길 코스 그대로였다. 또한 이 길은 이상화 시인이 마음 울적할 때마다 백부 댁이 있던 서성로 우현서루(友絃書樓)를 나와서 즐겨 찾아가던 앞산 밑 보리밭, 그 들판을 자주 다녀오던 바로 그 길이다. 상화 시인은 자신의 단골 산책코스이던 앞산 밑 보리밭이 어느 날부터 일본군 공병대의 군수장비로 마구 파헤쳐지고 비행장 활주로가 되어가는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이 현장을 보고 격분의 심정으로 쓴 시가 바로 절창(絶唱)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이 소상한 과정은 시인의 아우 이상백(李相佰, 1904~1966) 선생이 1962년 동아일보 신문칼럼에다 밝힌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그 일본군비행장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군비행장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아직도 대구시민들은 이곳을 미국으로부터 돌려받지 못했다.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을 새긴 시비(詩碑)가 건립되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사업을 대건 출신 문학인 동문회에서 선도적으로 주선해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고월과 상화가 다녔던 그 도로를 횡단해서 다시 달서천 둑길로 접어들면 좌우로 아주 힘겹게 살아가는 빈민촌이 펼쳐진다. 지붕을 짚으로 이은 초가들도 흔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왼편으로는 계산동(桂山洞) 성당의 첨탑이 보였고, 그 맞은편으로는 성당보다 더 높은 언덕에 화강암으로 지어진 제일교회의 우람한 건축물이 보였다. 그 교회 아래쪽 넓은 터에는 매우 커다란 한옥 고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이 친일부호 장길상(張吉相, 1874~1936)의 집이라 하였다. 그는 경북 선산 출생으로 형조판서 장석용의 손자이며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로 장직상(張稷相, 1883~1959), 장택상(張澤相, 1893~1969)의 형이다. 장택상은 미군정기 수도경찰청장으로 자유당정권 반공노선의 첨병이다. 장길상 형제들은 1912년 대구의 일본인 자본가들이 선남상업은행을 설립할 때 자본을 투자하여 모두 금융자본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일제와 영합하여 기회주의적 자본가로 득세할 수 있었던 친일파 세력이다.

이 장길상의 맏아들 장병천은 대중문화사에서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여러분은 딱지본소설로 만들어진 <강명화전(康明花傳)>이란 작품을 혹시 아시는지? 대구 갑부의 아들 장병천(張炳天, 1900~1923)은 한강에서 기생 강명화(1900~1923)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얼굴이 귀엽고 가무(歌舞)에 출중하던 강명화의 뒤를 장병천은 미친 듯이 따라다니는데 마침내 강명화는 장병천의 진심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병천의 부모는 둘의 사랑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장병천은 일본으로 강명화랑 함께 유학길을 떠난다. 많은 박해와 멸시, 조롱과 비판이 그들 뒤를 따라다닌다. 마침내 험난한 곡절을 이기지 못한 채 강명화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애인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가 사라진 된 장병천도 곧 뒤따라 극약을 삼키고 생을 마감한다는 슬픈 순애보(殉愛譜). 둘의 비극적 사랑을 다룬 <강명화전>은 세간에서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사연을 담은 슬픈 강명화의 노래는 죽기 전 강명화의 심정을 옮긴 가사였다. 이것이 당시에 유행하기도 했다니 대단한 화제였다.

슬프다 꿈결 같은 우리 인생은
풀끝에 맺혀있는 이슬 같도다
무정야속 저 바람이 건들 불며는
이슬 흔적 순식간에 없으리로다

가정불화 사회책망 빗발치듯이
내외협공 짓쳐드니 침식 없으니
박명인생 나의 일신 관계없지만
우리 낭군 만리전정 그르치겠네

바로 그 장병천이 어린 시절에 살았던 옛집을 지나서 서현교회(西峴敎會) 쪽 언덕길을 둑방 길로 곧장 올라가서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가면 바로 대건중학교 교문이 나타난다.

대구 대건중학교의 옛건물(지금은 성유스티노 신학교로 바뀌었다) ©이동순

4

나의 재학 시절은 1962년부터 3년 동안이다. 교장은 장병보(蔣秉輔) 베드로 신부였고, 1학년 때 담임은 지리의 이영로 선생, 2학년 때는 물상의 남규억 선생, 3학년 때는 영어의 김세태 선생 등이다. 이영로 선생은 칼칼한 성격의 청년교사로 나는 공납금 미납자 명단에 들어 자주 집으로 쫓겨 갔다. 하지만 집에 가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던 것! 멋쩍은 얼굴로 학교에 돌아오면 따가운 눈총을 줄곧 보내시던 분! 남규억 선생은 체구가 크고 피부색이 희었으며 외국인의 풍모를 지녔다. 출퇴근을 항시 멋진 스쿠터로 다니셨다. 당시 고상한 빛깔의 유럽풍 스쿠터는 매우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김세태 선생은 키가 작았다. 안경을 끼고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특별히 인상적인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별명이 ‘새털’이었다.

재학시절 전반을 통틀어 뚜렷하게 기억나는 그림은 그리 많지 않다. 집에서는 늘 불안기류가 감돌았고, 학교에서도 급우들과 친밀하게 어울리지 못했다. 2학년 때는 학교가 너무 싫어져서 아버지께 고향의 시골중학교로 전학을 시켜달라고 울면서 조른 적도 있었다. 차츰 마음이 안정되면서 학교 분위기에 젖어들었는데 음악의 안종배 선생은 몸매도 날렵한 멋쟁이셨다. 플라타너스 우거진 학교의 높은 언덕배기를 돌아가면 붉은 벽돌건물이 있었고, 그 2층에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빛이 차단되는 대형커튼으로 창문을 모두 가렸고, 우람한 스피커가 앞에 양쪽으로 놓인 그곳에서 어린 중학생들은 선생님 지시에 따라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을 기다렸다. 이윽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쥬페(Franz Von Suppé 1819∼1895)가 작곡한 명곡 <경기병 서곡(Light cavalry overture)>의 선율이 도발적으로 흘러나왔다.

병사들이 먼 곳에서 부는 나팔소리는 아득히 먼 곳에서 들여오는 듯했다. 들판 저 너머에서 달려오는 말발굽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는 이미 내 앞을 스쳐서 반대편 벌판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스테레오 음향효과의 기이한 놀라움을 난생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다. 말굽소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실감나게 재생이 되었다. 음악은 우선 귀로 듣지만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는 선생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자주 감상실을 드나들면서 음악 감상의 효과와 즐거움을 조금씩 깨달아갈 수가 있었다. 예술에 대한 경험은 놀랍고 신선했다. 미술시간에는 유명한 강우문(姜遇文, 1923~2015) 화백으로부터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만큼 대건중학교에는 쟁쟁한 교사들이 다수 포진해있었다. 그분들은 이후 전국의 문화계에서 명성이 높았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분들도 많이 계셨다.

대건중고등학교는 해마다 5월 행사가 크고 화려하다. 왜냐하면 가톨릭 대구교구에서 세운 학교라 교명도 성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 안드레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가톨릭에서 5월은 성모성월(聖母聖月)로 부른다.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의 어머니인 동정마리아를 각별히 공경하면서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며 마리아의 모범을 본받도록 한다. 학교에서도 5월에 전교생과 가톨릭신자들이 함께 모여 성대한 미사를 드리는데 이때 부르던 찬송가가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성모의 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 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 모아 성전 꾸미오며
기쁜 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장병보 베드로 교장신부님은 높은 모자를 쓰고 미사를 집전했다. 대구교구의 서정길(1911~1987) 요한 대주교는 위엄이 느껴지는 가운데가 뾰족한 고깔모자를 썼다. 이날 붉은 색의 작고 동그란 바가지처럼 생긴 주케토(Zucchetto) 모자를 쓴 여러 신부님들이 다수 미사집전에 참석해서 화려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인교동 친구 H의 세례명은 바미야마였다. 나는 입교한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미사 끝까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학교 바로 뒤쪽으로는 천주교 성모당(聖母堂)이 있었다. 이곳은 1911년 봄, 천주교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 드망즈(Demange, 한국명 安世華) 주교가 성모마리아의 발현지인 프랑스 루르드 동굴 모양을 그대로 본떠 만든 곳이다. 가톨릭신자들에겐 성지처럼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중학교 재학시절 나는 눈 쌓인 성모당을 배경으로 형이 입던 가죽점퍼를 입고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것은 2학년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내 옆 짝 L군은 대구의 유명한 녹향 음악감상실 대표 이창수 씨의 아들이다. 넉넉한 집이라 옷도 남들보다 깔끔하게 입었고, 우표 수집을 비롯해서 다양한 취미생활이 남들보다 앞서가던 친구였다. 내 앞에 앉은 친구 S는 시를 제법 잘 써서 일찌감치 국어담당 이주홍 선생의 귀염을 받았다. 선생께서는 어느 날 시를 한 편씩 써오면 심사를 해서 문예반 가입을 결정한다고 했다. 반드시 문예반 가입을 하고 싶었지만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시를 써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고심을 해도 단 한 줄의 글귀가 나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아버지께 털어놓았더니 가련한 막내를 도우려는 마음으로 한시 번역조의 뜬금없는 작품을 써주셨다. 제목은 <행화촌(杏花村)>! 누가 보더라도 중학생 작품이 아닌 것이 환하게 드러나는 야릇한 작품으로 낙심천만이었다. 차마 제출의 용기를 내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얼마 뒤 문예반원 특집으로 편집된 교지가 발간되었을 때 같은 반 친구 S의 시작품이 실린 것을 보고 선망(羨望)과 질투심으로 명치끝이 아파오는 것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수치의 경험이 나를 조금씩 성장시켰을 지도 모른다.

아침조회시간이면 동급생 P가 자주 전교생 앞에서 큰 상을 받는 광경이 있었다. 그는 서울의 전국고교백일장대회에 나가서 웬만한 상을 모두 휩쓸어오는 단골수상자였다. 서울에서 이미 받아온 상장과 상품을 아침조회 때 교장신부가 다시 생색을 내며 수상장면을 재연하는 것이다. 아래쪽에서 박수만 치고 있는 내 꼴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국어를 가르치던 류시열 선생은 몹시 무섭고 엄격한 성품이었다. 그 분의 아들은 나랑 같은 반이어서 국어시간 아버지로부터 수업 받는 모습이 못내 부러웠다. 그 류선생님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에 수성구의 어느 교차로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하니 너무 허무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도 별반 없었고, 외돌토리 신세의 적막함은 당시 내 처지이자 마음의 빛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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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당 뒤편에는 대구의 천주교교구에서 평생을 일하다 세상을 떠난 가톨릭 교역자 묘역이 있다. 19세기 후반 대구교구에서 일했던 외국인 신부에서부터 비교적 근년에 선종(善終)을 한 교역자들까지 그곳에 묻혀 있다. 면적이 넓지 않은 그 성모당 내부의 묘역에 묻힌다는 것은 큰 영광이라 할 수 있겠다.

얼마 전 가족들과 성모당을 들렀다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서 성직자 묘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묻힌 시대에 따라 묘지의 형태와 비석의 모습들이 각양각색이라 골고루 들러서 두루 살펴보았다. 어느 한 곳에 이르렀는데 뜻밖에도 낯익은 성함이 보였다. 그 무덤은 내 중학교 시절의 교장 장병보 신부가 잠든 영면(永眠)의 장소였다. 서양식으로 사진도 비석에 들어있었고, 생몰연대가 적혀 있었다. 나는 옛 교장 선생님 무덤 앞에 가서 재학시절을 생각하며 영계(靈界)의 평화를 빌고, 잠시 묵상(默想)에 젖었다. 선생께서는 후덕한 인상으로 음성도 잔잔하고 아늑한 사랑을 느끼게 하셨다.

성모당에서 내려다보는 옛 모교 대건중학교의 풍광은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다. 고목이 된 플라타너스, 밑동에 굵은 주름이 잡힌 아카시아, 우아한 선으로 솟아있는 성당의 첨탑도 그대로다. 하지만 지금의 대건중학교는 대구의 서쪽 월성동으로 옮겨간 지가 어언 27년이 넘었고, 모교가 있던 터전은 대구신학대학으로 바뀐 지 오래다. 내 모교가 있던 곳에서 신학생들이 학업을 갈고 닦아 장차 사제(司祭)나 성직자로 배출되는 것이다. 무릇 학교라는 공간은 얼마나 뜻 깊고 보람 있는 육성(育成)의 장소인가? 그 누군가를 배움으로 이끌어 가꾸고 키워서 한 사람의 당당한 인간으로 배출시키는 것! 이보다 더 거룩하고 값진 일이 어디 있으랴?

나는 성모당 앞 벤치에 앉아서 옛 모교 쪽을 하염없이 내려다본다.

재학시절로부터 강물 같은 세월은 얼마나 흘러갔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니 55년 광음(光陰)이 후딱 지나가버렸다. 그 시절은 비록 외롭고 고단한 심신이었으나 이제 와 되짚어 보노라니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럽던 성장(成長)의 시간이었던가. 가슴 속에 꿈도 많고 사랑도 풍성했던 그 청춘의 시간은 이제 멀고 아득한 곳으로 떠나갔다. 그러나 눈물의 습기로 젖은 파릇파릇한 추억들은 내 가슴 속에서 햇살에 반짝이는 사금파리처럼 살아나 제각기 하나씩 생기(生氣)의 빛을 머금고 있나니……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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