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진의 민낯칼럼]

#벌써 30년도 훨씬 넘었다.
연세대학교 신학과 J교수에게 기독교계통 책을 펴내는 K출판사를 소개 받았다. 전에도 그의 소개로 M사의 <기독교대전>이라는 백과사전 번역에 참여한 바 있었으니 기독교계통 번역이 처음은 아니었다. K출판사에서는 새로운 해석과 주석의 성경책을 번역하여 출판한다고 했다. 성경을 번역할 만한 빵빵한 영어실력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다, 모태신앙이라고는 하나 ‘못된 신앙’의 기독교인 일뿐 최소한의 신학적 배경이나 훈련도 없는 터라 찜찜했다. 그렇지만 과대평가해 준 선배에게 ‘사실 영어를 잘 못...운운’ 하며 불편한 진실을 고백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당시 영어 번역료는 원고지 1매당 800원이었다. 그러니까 A4 한장을 번역하면 5000원정도 되는 셈이었는데 설렁설렁 일을 해도 매주 5만원 가량은 벌어 쓸 수 있으니 당시로서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픽사베이

#일주일에 두세번, 저녁 때 나가면 됐지만...
문제는 숭인동 뒷골목의 낡아빠진 2층 건물 다락방에 있는 출판사 ‘꼴’이었다. 허리를 펴고 설 수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은 참는다 해도 ‘과연 번역료가 나올까?’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번역 작업은 나름대로 재미있었고 함께 번역하는, 교양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대학원생 여인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나 빼고는 전부 여자였다.) 동대문에서 먹는 ‘닭한마리’도 맛이 있었고, 와사비를 듬뿍 찍어먹던 삼치구이도 좋았으니 돈 의심만 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다닐 만했다.

알바를 시작하고 나서 여섯달만에 작업은 모두 끝났다. 지금은 얼굴조차 보기가 힘들어진 편집장 S선배는 어디서 꿍쳐왔는지, 작업이 끝나고 1주일 후에 가진 쫑파티에서 알바 전원에게 번역료를 ‘일시불’로 지급했다. 일하는 6개월 내내 돈에 관한 한 줄곧 의심했었기에 순간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른다.

#신간 T성경은 기존 성경책보다 두배 가량 비쌌다.
보통의 한국인들이 제돈 내고 성경책을 잘 사질 않았던 당시(요즘도 그럴 것 같지만) 상황에서 두배나 비싼 성경이라니... 애초부터 무모한 기획이어서 사장과 편집장의 다툼이 심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두둑한 봉투를 모두 탕진했을 즈음이었다. 듣자니 그나마 숭인동 다락방에서도 쫓겨나 휘경동 어딘가로 이사했고, 편집장 S선배는 ‘잠수를 타고’ 연락두절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망한 모양이구나’ 연민으로 출판사와 편집장을 마음깊이 추모했던 것도 잠깐이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그런 일들 모두를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났을 즈음, J일보 사회면 톱으로 실린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빵잽이 A와 B는 안양교도소에서 만난 사이였다.
특가법상의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강력범도 아닌 단순절도, 이른바 생계형절도범이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무전유죄였는지... 1년을 한방에서 지내며 우정을 나누다가 B가 먼저 출소를 하게 됐다. 교도소에 혼자 남게 된 A는 기독교인이었다. A는 출소하는 B에게 부탁을 했다. “B야! 너 출소하면 꼭 T성경책을 사서 영치시켜 달라. 남은 기간 동안 성경책 열심히 보고 새사람이 되어 너를 만나고 싶다.” B는 출소하자마자 T성경을 사서 영치시키고 자주 면회 가리라 작정했다. 그러나 사고무친 외톨이에 불학무식의 전과자인 B에게 T성경을 살 몇 만원은 너무나 큰돈이었다.

교도소에 남아 있는 A에게 자존심까지도 상했다. 한달이 지났는데도 돈을 구하기는커녕 점점 막막해졌다. 결국 B는 서점에 들어가 문제의 T성경을 훔치다가 붙들려 다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B는 국선변호인에게 “제발 A에게 T성경을 넣어달라”고 울부짖었던 것이 당시 J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K기자에게 알려져 신문에 게재됐던 것이다. 인간세상이 알 수 없는 일로 가득 차 있다고는 하지만 이 같은 ‘가슴아픈 미담’이 대박을 안겨줬으니 출판사는 도둑우정이 살려놓은 은혜로운 대박출판사가 됐다.

#신문기사가 난 후,
‘대체 그 T성경이 뭐길래......’ 너도 나도 한권씩 사기 시작하여 출판사는 몇판 몇쇄... 계속 찍어댔고 결국엔 숭인동 다락방을 추억으로 남긴 채 강남 요지에 사옥을 짓게 되었으니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사 아닌가. 이후로 출판계에 봇물같이 ‘ㅇㅇ주석’이니 ‘해설서’ 등등이 번역·출판되기 시작했으니 그들 출판사들이 한결같이 대박을 터트렸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비록 30년이 훌쩍 넘었고 ‘시키는대로, 신학과 교수에게 검사 받아가며 번역했을 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 T성경의 공동번역자로서의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다. [오피니언타임스=안희진] 

 안희진

 한국DPI 국제위원·상임이사

 UN ESCAP 사회복지전문위원

 장애인복지신문 발행인 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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