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의 석탑 그늘에서]

[오피니언타임스=서동철] 한반도에서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오늘날 새로운 개발 사업을 하기에 앞서 발굴조사를 먼저 하도록 제도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파트를 짓거나 공장을 세우는 개발 사업으로 혹시 지하에 있을지도 모를 과거의 중요한 흔적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이다. 과거의 흔적은 때로 중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구석시시대 사람이 살았던 집터 위에 다시 신석기인이나 청동기인이 마을을 이루었던 흔적은 얼마든지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어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는 사례는 불행하게도 거의 없다. 기록으로만 남기고 아예 사라지는 유적이 대부분이다. 정말 중요한 유적이라고 학계의 의견이 모아진다 한들 그저 형식적일 정도로 일부만이 보존되는 것이 현실이다. 개발 사업이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따라서는 그 일부 유적조차 제자리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존되는 사례도 적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과거의 흔적’이 중첩된 현상은 당연히 선사시대에 그치지 않는다. 강화는 고려왕조가 1232년부터 39년 동안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강화읍 관청리의 고려시대 궁궐터 발굴조사에서는 당시 건물 유구가 대거 확인됐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고려 왕궁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와 복원한 외규장각 건물만이 자리잡고 있다.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불을 질러 모두 타버린 아픈 역사가 있다.

그런데 인천광역시는 최근 강화의 고려시대 수도를 되살리는 사업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강도(江都)의 꿈’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궁궐과 성벽을 전면 발굴하고 복원해 역사문화단지로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장기적이고 전면적인 발굴조사로 고려시대 왕궁과 도성의 양상을 확인하겠다는 인천시의 계획은 바람직스럽다고 본다. 하지만 고려시대 왕궁과 조선시대 그 위에 들어선 강화유수부와 외규장각의 흔적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는 궁금하기만 하다.

이것 말고도, 한 시대의 역사를 담은 유적과 또 다른 시대의 역사를 담은 유적이 충돌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과 강릉, 그리고 이곳에 들어선 태릉선수촌의 보존 문제도 그렇다. 태릉은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강릉은 제13대 왕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의 무덤이다. 태릉과 강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당시 유네스코는 훼손된 능역의 원형 보존을 권고했다.

태릉과 강릉은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태릉 선수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66년 태릉과 강릉 사이를 가로막는 자리에 대형 국책 스포츠 시설이 들어섰다. 태릉 선수촌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총본산이 됐다. 국가대표 스포츠선수 훈련시설을 건설할 넓은 부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당시 문화공보부의 외국(外局)에 불과했던 문화재관리국이 관리권을 가진 왕릉 마당을 손쉽게 전용한 것이다. 오늘날이라면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선수촌, 즉 국가대표종합훈련원은 지난 9월 충북 진천으로 이전했다. 이후 옛 선수촌 건물을 철거하겠다는 문화재청과 한국 현대 스포츠의 역사를 보여주는 시설의 보존이 필요하다는 체육계의 목소리는 엇갈리고 있다. 체육계는 문화재청의 근대문화재 등록제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는 듯 하다. 50년 넘은 문화유산을 등록해 보존을 유도하는 제도다. 하지만 훼손된 유적의 진정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문화재청의 의지 또한 만만치 않은 듯하다.

도봉서원과 영국사의 중첩된 역사는 자칫 유불(儒彿) 갈등으로 비화할 폭발력마저 없지 않다. 서울 도봉산 아래 도봉서원 발굴현장에서는 최근 영국사 혜거국사비(碑)의 일부가 발견됐다. 혜거국사비는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1688)에 탁본 일부가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281자가 새겨진 다른 조각이 확인된 것이다. ‘견주 도봉산 영국사’(見州 道峯山 寧國寺)라는 글자도 있었다. 견주는 서울 도봉구와 경기 양주시 일대를 아우르던 고려시대 행정구역이다.

이 발견으로 혜거국사와 관련된 의문 상당 부분이 풀렸다. 무엇보다 도봉서원에 앞서 있었던 건물이 영국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됐다. 도봉서원은 중종시대 도학정치를 주창한 정암 조광조를 기리고자 1573(선조 6) 창건됐다고 한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명맥이 끊긴 것을 1972년 건물 일부를 복원했다. 이후 창건 당시 서원의 유구를 찾는 과정에서 천년고찰 영국사의 역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 도봉서원터에서 발견된 영국사 혜거국사비 비편(왼쪽)과 그 탁본 ©문화재청

앞서 2011년부터 3년동안 도봉서원에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는 서원을 지으며 통일신라시대로 올라가는 옛 절 건물의 일부를 재활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큰 법당에 해당하는 중심 건물지에서는 고려시대 금속공예의 진수라고 해도 좋을 초기 고려시대 이전의 금강저와 금강령 등 국가지정문화재급 불교의례 용구 77점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발굴조사는 도봉서원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도봉구청이 추진한 것이었다. 그런만큼 유림(儒林)은 계획대로 서원을 복원하는 것은 바라고 있다. 반면 불교계는 “도봉서원은 조선시대 척불(斥佛)정책 아래서 영국사를 파괴하고 지은 만큼 서원만 복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주장한다. 물론 유학자들이 영국사를 허물고 서원을 세웠다는 불교계의 주장은 검증이 필요하다. 영주 숙수사터에 세운 소수서원처럼 폐사지에 서원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강화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유적, 서울 태릉·강릉과 선수촌, 도봉서원과 영국사 모두 유적 보존의 우선 순위에 정답은 없다. 역사가 중첩되어 있는 유적의 보존 과정에서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한쪽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말할 것도 없이,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최선의 보존 방향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특히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고자, 역사적 의미에 대한 배려를 소홀히 하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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