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그 시절 그 노래]

[오피니언타임스=이동순]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1900~1929)는 192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시인이다.

만해 한용운이나 김소월처럼 한국문학사에서 걸출한 문학인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그 나름대로 당대의 대표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각급 학교의 교과서와 문학교재에서 그의 시작품이 빠지는 경우가 많지 않다. 하지만 고월 이장희를 단번에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른바 ‘7080’ 세대들의 경우 백이면 백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아, ‘그건 너’를 부른 가수 이장희 말이지요? 그 가수가 시도 썼던가요?”

이런 반응에는 질문 자체가 아예 무색해진다. 요즘 청년세대들은 더더욱 이장희를 모른다. 그러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봄은 고양이’ 어쩌구 하는 시를 쓴 사람을 기억하느냐고 물으면 그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대답한다. 놀랍고 무서운 일이다. 이름은 몰라도 고양이와 관련된 특정 시인의 개성과 분위기는 짐작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의 전체 문학사를 통틀어 일찍 요절한 문학인들의 경우를 이야기할 때 고월 이장희는 반드시 단골로 들어간다. 불과 29세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한 자료에 수록된 이장희 연보에는 이장희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29년 11월3일 오후 3시경, 이장희는 대구부(大邱府) 서성정(西城町) 1정목(町目) 103번지 본가의 머슴이 거처하던 작은 방에서 극약을 복용하고 한 장의 유서나 한 마디의 유언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지는 선산인 대구부 신암정으로 정해져 유해가 안치되었으나 지금 현재 그의 묘소는 찾을 수가 없다.
-‘봄은 고양이로다’(김재홍 편저)의 연보 부분

이 어인 변고인가? 망자의 무덤을 찾을 수가 없다니.
흘러간 나의 20대 청년시절,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이승을 하직한 시인 이장희의 존재성에 대해서 나는 유난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졌었다. 왜냐하면 고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고월의 경우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으므로 어머니의 얼굴도 기억할 것이고, 또 어머니와의 추억도 가슴에 사무치도록 새겨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불과 10개월짜리, 강보에 쌓인 젖먹이를 방 윗목에 버려둔 채 홀로 이승을 하직하셨기에 나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모른다. 나를 낳고 어머니는 줄곧 시름시름 위중한 병을 앓으셨으므로 나는 어머니의 젖도 빨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고월의 경우는 그래도 나보단 낫다는 생각을 한다.

고월 이장희는 그 어머니의 기억이 가슴이 내내 사무쳐서 새 어머니에 빠져있는 아버지, 이재(利財)에만 눈이 밝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점점 커져만 갔다. 가슴 속에서 어머니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을 터였으나 어머니를 생각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처신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고 증오심으로 발전되어갔다. 이 때문에 자주 아버지와 의견의 대립과 충돌이 있었고, 가족 간의 갈등이 깊어져 갔다.

워낙 집이 부유했으므로 이장희의 부친은 아들을 일본 경도중학(京都中學)으로 유학을 보냈지만 항상 심리적 불안과 초조 속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결국 고향 대구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집 사랑채 작은 방에 내내 갇혀만 있었다. 자기 스스로를 가두었다고 말해도 되겠다. 빈 종이에는 낙서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었는데, 어항 속의 금붕어였다고 한다. 그 금붕어는 바로 인습의 굴레와 비운의 숙명 속에 갇힌 이장희 자신의 모습을 표상한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아무리 금붕어를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린다 할지라도 고월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불행의 굴레가 해소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장희는 스스로를 죽음의 수렁으로 몰고간 것과 다름 아니다.

나의 20대 시절, 학비와 생활비는 곤궁하고 내일의 전개는 하염없이 불투명하던 때 나는 왜 그리도 이장희의 칙칙한 불행과 비극성에 슬그머니 빠져들었던지, 기어이 고월 이장희의 무덤을 찾으려는 뜻을 가지고 대구의 동구 신암동 일대를 헤매 다닌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이 비밀스런 사업은 종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월이 세상을 떠난 1929년만 하더라도 대구 신암동 일대는 완전히 대구의 변두리 지역으로 밤이면 여우가 흉흉하게 울어대는 공동묘지와 가시덤불로 뒤덮인 구릉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곳이 해방 이후 대구로 유입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신암동은 도시 진출로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한 주변부 인생들이 거주하는 빈민촌으로 형성되었다. 판잣집, 양철집, 바라크집, 하꼬방 등등 1950년대 특유의 난민촌을 방불케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고월의 무덤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주인 없는 무덤으로 포크레인의 삽날에 밀려 두개골과 무릎 뼈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흙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살아생전에도 한없이 고독했던 이장희는 죽어서도 찬밥신세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무주고혼(無主孤魂)이란 말은 고월 이장희의 경우를 두고 하는 어휘가 아닐까 한다.

그로부터 무려 20여년이 지난 즈음에 내가 고월 이장희의 무덤을 찾겠다고 신암동 일대를 뒤지고 다녔으니 과연 어느 지역이 공동묘지였던지, 어느 구간이 이장희의 무덤이 있던 곳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최소한의 자료나 증언도 듣지 못한 채 나는 다만 바람 부는 허공중에 홀로 슬피 울며 헤매고 있을 고월 이장희의 원혼을 느끼면서 호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찌른 채 혼자 방황하고 다녔던 것이다.

당시 대구의 시청 부근에는 ‘돌체’란 이름의 지하막걸리집이 있었는데, 주로 가난한 대학생들과 싸구려술집을 좋아하는 부류들이 늦은 밤까지 드나들던 술집이었다. 고월의 묘소를 찾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날, 나는 돌체의 탁자에 혼자 앉아 몇 주전자의 막걸리를 비웠던 것인가. 안주라곤 구운 꽁치 한 마리와 마구 썰어내 놓은 양파, 날고구마 조각이 전부였다. 그렇게 몇 되를 마셨던 것일까? 밤이 깊어갈수록 점차 술기운이 달아올라 몽롱해지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나는 드디어 고월 이장희의 실루엣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 지신의 덧없는 환영(幻影)이었다. 그리곤 그 뒤로 이장희를 아주 잊었다. 더 이상 고월, 혹은 고월 스타일의 비극적 탐닉에 잠겨들다간 내 인생이 절단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06년 여름, 대구시에서 발간하는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지(人物誌)에 대한 원고 집필청탁을 받고 나는 다시금 고월 이장희의 기억과 실루엣을 먼지 속에서 찾아 털며 예전 일을 되새겼다. 그동안 세월은 강물처럼 참 많이도 흘러갔다.

고월 이장희란 존재는 다시금 지역민에 의해 되새겨져서 대구의 달서구에 위치한 두류공원에 고월시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시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너무 투박하고 너무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제작하여 고월의 문학정서를 되새기려는 문학도들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비 하나를 만들더라도 그 시인 특유의 생애와 작품성을 고려하여 좀 더 아담하고 분위기 있게 제작하면 어떨까. 한국현대사 100여 년 동안 우리는 이렇게 과거의 문화를 마구잡이로 구획하고 거침없이 왜곡시키면서 살아온 것이다.

고월 이장희의 문학과 관련하여 우리가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라곤 ‘상화와 고월’(백기만 편, 청구출판사, 1951), ‘씨뿌린 사람들’(백기만 편, 경북작고예술가평전, 사조사, 1959), 그리고 이장희전집과 평전으로 꾸려진 ‘봄은 고양이로다’(김재홍 편저, 문학세계사, 1983) 등이 거의 전부이다.

옛스런 분위기가 감도는 꽃병들로 가득한 표지 장정의 ‘상화의 고월’에서 이상화 다음으로 수록된 고월 이장희 편의 삽화는 금붕어이다. 추연근(秋淵槿) 화백이 그렸다는 금붕어 삽화는 검은 어둠을 배경으로 물밑바닥에서 아슬아슬하게 헤엄치고 있는 금붕어의 모습이다. 금붕어는 한 줄기 수초에 의지하여 겨우 몸의 중심을 가누고 있는데, 숨쉬기가 답답한 듯 입에서는 줄곧 공기방울을 뿜어내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금붕어의 눈은 노한 눈빛이다. 무엇에 대하여 금붕어는 저렇게도 분노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금붕어의 모습이 고월 이장희의 이미지와 너무도 닮아있다. 그러니까 추연근 화백은 이장희의 작품을 읽어본 뒤 오래 생각하고 그린 금붕어 삽화를 완성했던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으로 가볍게 흘려버리기 쉬운 금붕어 삽화가 이토록 생생한 감동과 전율을 주게 될 줄이야.

‘씨 뿌린 사람들’에는 삽화가 들어있지 않고 다만 무애 양주동의 고월 회고록과 작품 3편 만이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표지화는 연둣빛 바탕색을 배경으로 혼자 춤추는 버드나무를 그렸는데, 이는 서양화가 정점식(鄭點植) 화백의 솜씨다. 고월 이장희는 저 버드나무처럼 아무도 눈여겨보질 않는데도 혼자 바람 속에서 가만히 일렁이다가 온다간단 말도 없이 세상을 홀홀히 떠나갔던 것이다. <계속>

 이동순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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