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웅의 촌철살인]

[오피니언타임스=김철웅] 벌써 20여 년 전이다. 신문사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러시아 구직 여성들, ‘인팀’ 때문에 고민 중”이란 기사를 썼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미혼여성·23살·1m70·쾌활한 용모·직업을 찾고 있음·비서직 희망·영어 및 부기 가능·‘인팀’은 사양함·전화 113-○○○○”

모스크바의 한 미혼여성이 광고전문지인 ‘이즈 루크 브 루키(손에서 손으로)’에 낸 구직광고이다. 광고문안은 단 한가지만 빼고는 우리와 다를 게 없다. 바로 ‘인팀은 사양한다’는 것 말이다. 인팀이란 뭔가. 사전에는 ‘친밀하고 거리낌 없는 분위기’라고 돼 있다. 영어 ‘intimate(친숙한)’와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속뜻은 다르다. 그건 직장 내 상사와 부하 여직원 사이의 내연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인팀은 ‘침대까지 함께 갈 수 있는 관계’를 말한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구인광고에는 이같은 인팀사양, 또는 인팀배제 문구가 거의 예외 없이 담겨 있다. 수백 건의 미혼여성 구직광고를 훑어 보면 10건 중 8건에는 인팀에 관한 언급이 있다. 20% 정도에만 이 문구가 없다.

필자의 러시아인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러시아 남성들은 ‘원칙적으로’ 부하 여직원과의 인팀을 상사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답했다. 더 나가 그는 “인팀에 관한 언급이 없는 구직광고는 그것을 수용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팀 사절’ 광고는 러시아 직장 내 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였다. 그렇다면 20여 년이 흐른 현재 상황은 어떨까. 여전할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지금도 계속 교류하고 있는 그 친구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마침 한국에서 한림대 성심병원 사태 등 성희롱과 관련된 부조리·부당노동행위가 줄을 잇고 있는 시점이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부턴가 구직광고에서 ‘인팀 사절’이란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한 젊은 여성은 “그런-인팀과 관련된-문제와 맞부딪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그 친구는 전했다. 그는 현직 공무원인데, 개인기업에서는 그런 관행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겠지만 채용할 때 조건을 다는 등 좀 더 은밀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러시아에는 여성을 경시하는 속담이 여럿 있다. “여자는 때리면 때릴수록 수프 맛이 좋아진다” 등이 그것이다. “여자와 북어는 때릴수록 맛이 좋다”는 우리 속담과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이나 러시아나 이런 속담에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사회의 전통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사회와 문화도 바뀌는 법이다. 20여년 전 러시아에서 보편적이던 ‘인팀 사절’이란 촌스런 광고가 사라졌다는 것도 나름대로 ‘역사의 진보’라면 진보다.

우리의 ‘벼룩시장’에 해당하는 ‘이즈 루크 브 루키’만 해도 모스크바 지역에서는 2015년부터 종이신문 발행을 중단했다. 미디어 소비성향이 급속히 인터넷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판만 발행부수가 10만부가 넘었던 1990년대 말이 정점이었다.

그런데 요즘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직장 내 성 추문에 관한 한 한국과 러시아의 상황이 역전된 듯하다. 러시아는 나름대로 개선되고 있지만 반대로 한국은 1990년대 러시아와 견줄 만한 인권 후진국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최근 발생한 것 가운데 대표적·상징적 사례가 한림대 성심병원 사태다. ‘걸그룹 춤을 추는 백의의 천사’는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그런데 해당 병원은 간호사들이 1년에 한 차례 열리는 재단 체육대회에 참석해 선정적인 춤을 추도록 강요당했다. 짧은 바지나 배꼽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서였다. 간호사들은 장기자랑 준비를 위해 업무시간을 마친 뒤에도 연습을 계속해야 했다. 때로는 휴일까지 반납해야 했다.

형용모순이라고는 했지만 백의의 천사가 절대로 걸그룹 춤을 출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자발적으로, 취미로 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간호사들이 재단 행사에서 강압적으로 동원됐다는 부분이다. 성심병원 문제를 처음 제기한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관계자는 “어떻게 대학병원급에서 저런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란 말을 했다.

그가 ‘저런 일’이라고 말할 때 떠오른 것이 1990년대 러시아 직장에서 성행하던 인팀 관행이다. 돌아보건대 필자가 20여년 전 그 기사를 쓴 동기는 “이런 희한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소개하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소련 해체 직후 혼란상황 속이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한국의 직장 내 성 문제가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사실을 20년 뒤 절감하게 될 줄이야.

   김철웅

    전 경향신문 논설실장, 국제부장, 모스크바 특파원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