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쇼사이어티]

[오피니언타임스=이성훈] 10살 때 쯤, 우연히 TV에서 일본 다큐를 봤다. 그 다큐는 일본 초등학생들을 위한 체험농장 이야기였다. 마치 영화 <옥자>의 한 장면처럼, 소들은 넓은 목초지에서 자유롭게 뛰놀았고, 돼지들은 진흙에서 뒹굴고, 닭들은 마음껏 모래를 쪼았다. 아이들은 그런 동물들과 어울리며 즐거워했다. 슬픈 장면도 있었다. 동물들이 도축되었고, 아이들은 농부와 함께 그 모습을 바라봤다. 동물들은 마취된 상태에서 단숨에 목숨을 잃었고, 아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어린 나도 울었다. 지금도 그때의 눈물을 잊지 못한다. 그때부터였다. 나에게 고기는 미안하고 고마운 식품이다.

새삼스럽게 육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즘 들어 주변에 고기를 멀리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때문이다. 생명을 희생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신념, 혹은 좁은 곳에 갇힌 채 재료도 알 수 없는 사료를 먹고 자란 짐승은 몸에 해로울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까지. 그들이 비건 혹은 패스코를 실천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픽사베이

사회학자 엘리아스의 말처럼 ‘문명은 더럽고 야만스러운 장면들을 우리의 눈앞에서 감추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식탁 위의 삼겹살, 치맥을 보며 소-돼지-닭이 나고자란 더러운 환경을 떠올리는 사람이 아직은 많지 않다. 그렇지만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구제역, 조류독감, 살충제 계란 파동을 보건대, 작금의 육식산업은 더 이상 지탱되기 힘든 어떤 임계점에 이른 것 같다.

나는 동물보호단체들의 콘텐츠에서 자주 불쾌함을 느낀다. 그들의 고발영상들은 잔인하고, 자극적이다. 남녀노소의 플랫폼에 저렇게나 잔인한 영상물을 올려야 하는지 불만도 크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잔인한 장면을 더 많이 봐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것이 현대 문명의 본 모습이기에 그렇다. 애완, 사육, 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생명체를 괴롭히고 길들여온 인간들. 우리들은 잔인한 현실을 더 많이 봐야만 더 많이 반성하고 변화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만 육식이 과연 종말 할까? 그렇지 않다. 고기, 달걀, 우유의 풍미를 즐기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으며,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당장 대신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육식은 보다 윤리적으로 변할 것이다. 소돼지닭이 철장에서 풀려나 넓은 들판에서 건강한 사료를 먹으며 자란다면, 소비자들도 안심하고 고기, 우유, 달걀을 즐길 수 있다. 그러자면 육식은 지금보다 3배는 비싸질 텐데, 그것은 비싸졌다기보다는 그동안 가축들이 터무니없이 싸구려로 길러진 탓이다.

생각도 습관도 다르지만 비건/패스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즐겁다. 고기 먹는 나를 보며 ‘매일 매일이 장례식’이라며 애도를 표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삼겹살을 먹을 때면 돼지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됐다. 비건 친구들은 고기가 불쌍해서 안 먹고, 나는 고기가 내 몸에 덜 좋겠다는 생각에 덜 먹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인간-동물-생태계, 그들의 생명과 권리가 하나로 이어져있음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동물권 아닐까. 나는 비건은 아니지만 고기를 먹으면서 고기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싶다. 이런 고민들이 하나 둘 모여서, 지금의 비위생적인 육식산업은 결국 바뀔 테니까.

 이성훈

20대의 끝자락 남들은 언론고시에 매달릴 때, 미디어 스타트업에 도전하는 철없는 청년!

오피니언타임스 청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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