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미의 집에서 거리에서]

©신세미

[오피니언타임스=신세미]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11월 말, 늦가을이란 계절 탓이었을까. 시(詩)가 내 일상으로 쓰윽 들어섰다.

11월 마지막 토요일인 25일, 산 중턱 나무 밑에는 이틀 전 내린 흰 눈이 남아 있던 가을의 끝자락. 볼을 건드리는 찬 바람이 거칠기보다 기분좋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친구 넷이 오전 일찍 만나 과천 서울대공원 삼림욕장을 한 바퀴 돈 뒤 점심 즈음 저수지길로 내려가고 있었다. 각기 다음 일정도 있고 해서 발걸음을 서두르는 중에도 햇살 아래 고요한 저수지의 반짝이는 은빛 물결이 눈에 들어 왔다.

단체 사진을 남기려고 지나가던 등산객에게 휴대폰 촬영을 부탁했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그 분은 장갑, 지팡이를 내려 놓고 성의껏 휴대폰 촬영을 도와준 뒤 몇 발자욱 걸어가더니 우리 일행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곤 “지금 이곳 풍경과 어울리는 시 한편을 낭송하겠으니 한 번 들어보겠느냐”고 했다.

낯선 상대의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으나 그렇다고 굳이 거절할 상황은 아니었다. 산속 저수지길 시 낭송 이벤트는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칠십 즈음의 등산객은 시를 읊었고, 우리 일행은 이심전심 등을 돌려 저수지를 바라 보며 시를 감상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위에 내리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의 ‘마음’)

©신세미

시 낭송자는 젊은 날 ‘문학청년’, 전직 국어 선생님, 혹은 은퇴 후 시와 더불어 인생을 관조하는 멋진 노년일까. 우리는 낙엽과 흰 눈이 공존하는 늦가을 산에서 시를 만난 감동을 나누며 귀가했다.

우연히 산에서 시를 감상했던 그 날은 시로 마무리한 ‘시의 날’이었다.

저녁 모임에서도 시를 만났다. 여학교 친구 송년 모임의 피날레가 윤동주 시인의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단체 낭송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밀린 정담을 나누느라 술렁거렸던 자리는 한 친구가 센스있게 모니터 영상에 올린 시와 더불어 일순 ’문학소녀’ 시절로 돌아갔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신세미

가을 석 달 중 마지막 달인 음력 9월을 가르킨다는 만추(晩秋)를 뒤로하며 생각이 많아진다.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을 지나 어느새 ‘내 인생의 가을을 맞으며’... 내 자신에게 물어볼 것을 대면하기가 민망하고 편치않다. 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키워야할 것들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신세미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후 조선일보와 문화일보에서 기자로 35년여 미술 공연 여성 생활 등 문화 분야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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