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화의 참말 전송]

​가을이 갔다.
그리고 정말 문득, 봤다.
세상을 껴안듯이 하얗게 덮여 있던 눈, 겨울이 와 있었다.
큰맘 먹고 당일치기로 감행했던 먼 남쪽 지방으로의 여행이 끝난 시간이었다. 자정이 지나지 않았으니 분명 아직은 오늘인데, 가을로 시작했던 하루는 흰옷을 입은 겨울이 되어 귀가하는 나를 맞았다.

‘가을에 떠났는데 겨울에 돌아왔네...’

©픽사베이

집 앞 전철역에 내려 호젓한 골목을 지나 내 집 현관 번호 키를 누를 때까지 나는 중얼거렸다.

‘하루에 두 계절을 사는구나...’

발목까지 묻어온 눈을 보는데 엘리베이터의 백색 불빛 때문이었을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녹아내리는 눈사람 같았다.

새벽에 집을 나서며 들었다. 발자국을 뗄 때마다 몸 안의 피돌기가 느껴질 만큼 선명하게 들려오던 소리, 은행잎 부서지는 소리였다. 11월 말, 세상은 짙은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몸 위에 몸을 또 떨구고 쌓여있던 은행잎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삼십오 년 만에 그 도시를 찾아갔다. 아니다. 오래 전 나를 만나러 갔다. 11월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11월은 그랬다. 온몸이 조이는 감정의 비탈에 나를 세우지만 그래서 생이 싱싱해지는 기적을 보는 달. 오래 전부터 나는 11월을 사랑했다. 언젠가 짙은 회색 구름이 벽이 되어 드리워져 있는 길을 내 숨소리만 들으며 절대로 뒤 돌아보지 않고 오래오래 걸어가고 싶은 달. 세상의 표정을 말하라면 무성하면서도 스산한 달. 무성해서 외롭고 스산해서 마음 간수에 집중하게 되는 달.

여행의 주된 목적은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자력으로 나를 끌어당긴 건, 지금이 11월이었고, 그곳이 내겐 삼십오 년 전의 시간과 삼십오 년 전의 장소, 삼십오 년 전의 내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열차가 떠나기도 전에 그곳의 공기가 손바닥 가득 느껴졌다.

옛 시간을 찾아간다는 것, 옛 장소에 다시 서 본 다는 것, 옛날의 나를 불러내 내 앞에 세운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세월이 흘렀다고는 해도 기억의 모서리에 박혀 있던 많은 이름이 툭툭 튀어나왔고, 그 이름들 때문에 나는 외로웠고 또 그만큼 따뜻했다.

상호는 바뀌었지만 그때의 꿈과 소망이 금방이라도 달려 나올 것 같은 찻집이 있는 골목을 나는 단박에 알아보았다. 사람의 등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를 처음 깨닫고, 펑펑 울었던 오래전 그 건물을 찾는데도 나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골목을 걷고 대로를 걷는 내내 햇빛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향해 걸어오는 무수한 나를 나는 보았다. 왈칵, 눈물이 터졌다.

사람은 늘 현재 시점에서 ‘추억’이라는 이름의 과거 시제로 자신이 지나온 길에 꽃을 심는다. 때문에 미래보다 과거는 스토리와 배경이 흐른 날 수만큼 향기가 짙어진다. 수많은 사랑 시와 사랑 노래를 보라. 그들은 현재를 살지 않는다. 미래는 가보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다. 과거는 맨 살, 맨 심장으로 느끼고 살았으니 그것만이 자신들의 세상인 것이다.

과거는 그런 것이다. 기대도 상상도 헛꿈도 아닌 내가 보고, 듣고, 지나며 살아온 시간. 추억은 그래서 정직하다. 정직해서 아프고 정직해서 귀하다.

©픽사베이

한 시절을 지나왔다고 나는 정말 지나온 사람일까?

그날 나는 오래전 걷고 뛰고 때론 주저앉아 울기도 했던 그 도시에서 걷는 나, 뛰는 나, 우는 나를 정말 신기하게도 한꺼번에 다 만났다. 모퉁이를 돌고, 그 찻집 그 카페가 있던 골목길을 걸으며, 시대극 세트장에 가장 먼저 세워졌을 것 같은 이층짜리 낡은 그 건물 앞에서, 그때의 나, 추억이라며 접었던 내가 지나온 시간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았다.

초승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11월, 날카로운 한기가 가득한 그 도시를 떠나야 할 시간은 너무도 빨리 왔다. 나는 그곳에 여덟 시간 머물렀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내가 그 도시의 기차역에 가로등이 되어 나를 비추다 초승달 쪽으로 하나 둘 사라졌다.

캄캄해진 그 도시에 지천으로 쌓여 있는 은행잎을 밟으며 나는 그렇게 나를 만나러 왔던 수많은 나와 헤어졌다.

그리고 눈 덮인 서울에 돌아왔다.
하늘엔 별도, 달도, 없었다.
그날 나는 11월에 11월이 되어 하루에 두 계절을 보았고, 하루에 삼십오 년을 살았다.

겨울이 왔다.

©픽사베이

오래된 노래를 듣네
오래 전 시간이 귀를 여네
양희은의 목소리가 사방에 벽을 세우네

기억은 언제나 감옥 같아
하늘도 풀밭도 수의(囚衣)로 감기네

​사랑, 그 쓸쓸함...

글자를 써놓고 보니
한글 자음 ㅅ이 다섯 개나 들어있네

시옷, 이라고 발음해보네
‘시’를 발음할 때의 스산함이
‘옷’에 가서 갇히네

시옷은 한자로 사람 人과 닮은꼴이네
사람이 갇히네

그곳은 감옥이네

쓸쓸함이란 수인번호가
문패로 걸리네

​조용하게 슬프네
다시...

- 서석화 詩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제목은 양희은의 노래 제목에서 인용

[오피니언타임스=서석화]

서석화

시인, 소설가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한국 가톨릭 문인협회 회원

저서- 시집 <사랑을 위한 아침><종이 슬리퍼> / 산문집 <죄가 아닌 사랑><아름다운 나의 어머니>< 당신이 있던 시간> /  장편소설 <하늘 우체국>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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