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문화로 만나는 세상]

[오피니언타임스=이대현] 요즘은 모든 것이 인터넷이다. 지식도, 정보도, 음악도, 영화도, 심지어 여론까지. ‘여론’을 강의하면서 매주 학생들에게 간단한 발표를 맡겼다. 그 주의 중요한 우리 사회 이슈에 대한 여론동향과 분석이다. 이슈에 대한 의제는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여론의 추이와 방향은 어떠하며, 그것이 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혹은 미칠 것인가 등이다.

그런데 분석 데이터가 하나 같이 ‘인터넷’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터넷 댓글의 분석과 통계이다. 선거철도 아니니 하루가 멀다고 내놓던 언론사들이 정당이나 후보 지지도에 대한 여론조사도 뚝 끊겨서, 사회적 이슈에 발 빠른 여론조사기관의 자료가 없어서만은 아니다. 그런 것이 있더라도 젊은이들에게 여론은 곧 인터넷 댓글이고, 여론조사는 그것에 대한 ‘좋아요’와 ‘싫어요’의 숫자이다.

신문과 방송까지도 이를 가지고 여론으로 보도하거나, 자신들의 사이트에서 여론조사랍시고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인터넷 폴(Poll)을 실시하고 그것을 뉴스로 내보내고 있다. 여기에 국가와 포탈까지 인터넷을 통해 여론을 묻고 있으니 가히 ‘온라인 여론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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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칼, 온라인 여론

민주주의는 여론정치이고, 인터넷이 그 여론을 위한 가장 경제적이고 개방적인 공론장이 되어가는 것을 시비할 생각은 없다. 여론조사란 것이 본래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한 의견을 알아내는 것이니 온라인이야말로 더 할 나위없는 도구다. 게다가 토론과 커뮤니케이션을 활발하게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숙의 민주주의’의 실현가능성도 높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여론조사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허점과 단점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참여자의 편파성이 강하다. 댓글이 토론마당을 보면 토론도 의 진정성과 수준도 떨어진다. 빠른 만큼 부정확한 주장이나 논리도 많다. 여론화 과정에서 이성적 합의보다는 감정의 표출의 기회로 삼으려는 경향도 강하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정파성이 앞선다는 것이다. 같은 조사도 언론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판이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니 언론사의 인터넷 폴은 국민 여론조사가 아니라 자신들의 독자, 자신들의 논조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의견일 뿐이다. 선거의 경우 언론사들이 여론조사기관과 손을 잡고 면접이나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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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의 함정, 편리함의 함정

인터넷 여론조사나 댓글은 편리성과 함께 숫자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참여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인구통계학적인 집단을 골고루 대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여론의 줄기가 아니다. 참여자가 거의 투표 수준만큼 많으면 모를까. 지금 사회적 이슈인 낙태죄만 봐도 그렇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이 청원하는 것도 일종의 온라인 의견형성이다. 폐지를 청원한 국민의 20만명을 넘었다. 그렇다고 폐지가 여론이라고 누구도 말할 수는 없다. 숫자에만 빠져 그것이 대세라고 한다면, 천주교가 진행 중인 낙태죄 폐지반대 100만명 서명운동 결과가 청와대와 반대로 나오면 이번에는 뭐라고 할 것인가.

온라인 여론의 또 하나의 함정은 부정확하고 부실한 정보이다. 여론은 개인의 의견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개인 의견은 이슈를 접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만약 그 이슈가 정확하지 않다면. 당연히 의견도 왜곡된다. 인터넷은 조급하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이슈의 앞뒤를 냉철히 살피고 판단하기를 싫어한다. 언론도 자신들의 뉴스가 온라인으로도 유통되기 때문에 덩달아 ‘빠르기’에만 매달린다. 냄비처럼 즉각 반응하고, 집단화해 버리는 현실에서는 여론도 춤 출 수밖에 없다.

그 춤에 어떤 사람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기도 하고, 정책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얼마 전 아이 엄마를 내려주지 않고 출발한 버스기사에 대한 성마른 비난, 어느 남자배우의 영화 촬영 중 여배우 성추행에 대한 갈팡질팡 논란, 한 유명식당 대표의 죽음에 대한 속단도 비슷하다.

여론이 독재도 낳는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민주주의에서 공론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공론장이란 ‘공적 사용을 전제로 모든 시민이 아무 제한 없이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토론에 참여해 공공 이익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사회적 삶의 영역’이다. 온라인 공간이 그런가.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민심이 무엇인가. 드러내는 마음만 하늘의 마음인가. 불멸의 고전인 <여론>을 쓴 월터 리프만은 여론을 믿지 않았다. “여론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그보다는 높은 식견과 광대한 마음을 가진 상상력이 풍부한 지성인들 사이의 대화야말로 민주주의의 생명”이라고까지 말했다.

여론이 특정집단, 정파의 마음이 되면 민주정치에 약이 아닌 독이 된다. 대중독재의 수단이 된다. 독일의 나치즘도, 이탈리아의 파시즘도, 박정희의 개발독재도 모두 여론이란 대중의 열광적 지지와 갈채를 등에 업고 나왔다. 여론만능주의, 나아가 인터넷 여론정치가 위험한 이유이다. 

 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저서 <소설 속 영화, 영화 속 소설>, <영화로 소통하기, 영화처럼 글쓰기> 外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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