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환의 코리아 프리미엄 프로젝트]

[오피니언타임스=이영환] 시장경제의 중심에는 기업이 있다. 경제 순환의 세 축인 생산, 분배, 소비는 모두 기업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선진 경제로 발전하려면 정부보다 기업의 질적 변화가 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보통 기업이라면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 즉 법인 기업을 지칭하며 나아가 증권시장에 상장된 상장기업을 의미한다. 수적으로는 비상장기업이 압도적이지만 매출이나 이익 규모를 감안한다면 상장기업들이 시장경제의 중심을 이룰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상장기업은 2016년 말 기준 유가증권시장에 779개, 코스닥시장에 1208개로 총 1987개에 달했으며 지금은 2000개를 넘어섰다. 1956년 3월 대한증권거래소가 출범할 당시 12개에 불과했던 상장기업의 수가 60년 만에 2000개를 넘어섰으니 양적인 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질적인 면을 고려하면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선 엄격한 상장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기업의 수는 지난 20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재무적으로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크면서 꾸준히 이익을 내는 기업들이 수적으로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와 같이 꾸준히 괄목할 실적을 올리는 기업도 있지만 이는 지극히 예외적이다. 오히려 삼성전자에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것은 증권시장만이 아니라 한국경제 전반의 관점에서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동안 새로운 상장기업은 대부분 코스닥시장에 신규 상장한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은 벤처 기업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어떤 면에서는 한국경제의 역동적인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다지 밝지 않다. 이른바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이라 불리는 강소기업들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과 같이 글로벌 차원에서 초국적기업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가진 벤처기업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의 벤처기업 상당수는 그야말로 ‘벤처’, 즉 모험을 하고 있는 위태로운 기업일 뿐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과감한 기업가정신이 부족한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벤처기업을 육성하는 생태계가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은데도 기인한다.

©픽사베이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더욱 불확실하게 전개될 미래를 생각할 때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기업의 역할이다. 요즈음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에 대한 논의가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앞으로 예상되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기업이 선봉에 서줄 것을 기대하는 일반대중의 바람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말은 이에 대한 논의가 불필요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기업문화가 일천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기업의 성장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의 대기업들 중 상당수는 과거 적산불하와 정경유착이라는 비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지대추구행위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앞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난국을 고려할 때 많은 기업들이 사회적 책임을 공감하고 이에 맞춰 기업 경영을 추진하는 것은 비단 기업 차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국민경제의 안정적인 성장과 분배의 불평등 완화와도 직결된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기업에게 이런 요구를 하기 전에 기업의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조직으로 간주되어왔다. 기업가치극대화 또는 주주가치극대화(shareholder value maximization)는 이것을 확장시킨 개념이다. 이와 대극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이해관계자이론(stakeholder theory)에 입각해 이해관계자 가치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해관계자란 기업의 주주, 임직원, 소비자, 금융기관, 협력업체, 정부 등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논의하기 이전에 기업의 목적에 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영리 조직임은 분명하다. 기업은 저렴하게 좋은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공급함으로써 소비자의 복지에 기여하고 최대한 이윤을 확보해 주주들에게 환원해야할 책임이 있는 조직이다. 이때 과연 기업은 어떤 관점에서 이윤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논의의 상당 부분은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간단히 말해 기업이 단기 이윤에 집착한다면 이로 인해 여러 가지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반면, 장기 이윤을 추구한다면 사실상 이해관계자가치를 고려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회적 책임의 상당 부분을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기업의 주인은 주주이므로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 과정에서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사고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예컨대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 기간 기업은 이해관계자가치를 추구했었는데 1980년대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시되면서 주주가치극대화 논리가 득세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주주가치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 경영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 것은 단기주의(short-termism)이다. 기업이 단기성과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기업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일련의 저서에서 단기주의에 입각해 주주가치극대화를 추구하는 주주혁명(shareholder revolution)이 미국경제를 약화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주주혁명이 초래한 가장 큰 부작용으로 장기투자보다는 주가에 유리한 정책을 선호하는 단기주의에 집착하도록 한 것과 전문경영자의 보수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을 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대체로 들어맞는 내용이다.

스티글리츠가 지적했듯이 주주혁명은 금융자본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증권법과 연방소득세법이 개정되어 기관투자가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전문경영자에 대한 보상이 단기성과와 연계되면서 주주가치극대화라는 현상이 보편화되었다. 즉 금융자본이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도록 규칙을 개정해 기업이 오직 주주가치극대화에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했던 것이며 이로 인해 경제 전반에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했다. 그는 “단기주의는 전문경영자에 대한 과도한 보상, 주주에 대한 배당의 증가, 빈번한 기업의 구조조정, 대규모 합병, 자본투자의 감소 등과 같은 현상을 수반한다. 그래서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제적 성과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과도한 시장지배력을 갖게 된 금융자본이 문제의 진원지이다.

©픽사베이

한편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은 기업은 주주가치보다 이해관계자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고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기업의 이해관계자에는 임직원, 소비자, 금융기관, 협력업체, 정부 등 다양한 주체들이 포함되어있다. 이로 인해 기업이 주주가치 대신 이해관계자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경우 개념적으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이들의 비중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주주가치를 강조하는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덧붙여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과 기업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심각하다. 특정한 사회사업에 기부금을 제공하거나 사회적 약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경우 기업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명예는 모두 소유주 개인에게 귀속되도록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들에게 기업의 돈은 자신의 주머니 돈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의식 수준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도 법인으로서의 기업과 대주주나 전문경영자를 혼동하는 웃지못할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유치한 단계를 넘어서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반대 논리를 편 경제학자로는 단연코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의 기업관에도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좋은 제품을 적절한 가격에 공급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있으며 기부와 같은 선한 행동은 주주가 배당금을 받아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주주들에게 다른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의 다음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기업 경영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주주와 노동조합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을 넘어서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견해가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자유경제의 성격과 본질을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자유경제에서 기업이 지는 책임은 오직 하나뿐인데, 이는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한에서 기업 이익극대화를 위해 자원을 활용하고 이를 위한 활동에 매진하는 것, 즉 속임수나 기망행위 없이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에 전념하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견해가 극단적인 면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음미해볼 점도 있다. 문제는 기업이 준수해야 하는 경제 규칙의 내용에 있다. 이 규칙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논의는 간단해진다. 이 규칙을 준수하는 기업은 일차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기업의 선택 사항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견해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기업의 책임에 관한 것이다. 공해를 유발하는 기업이 이에 따른 비용을 사회에 전가하지 않고 기업의 비용으로 내부화한다면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픽사베이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라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이윤을 무시하고 오직 사회적 책임만을 다하려는 기업은 결코 경쟁적인 시장에서 생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기회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단기 이윤에만 집착하는 기업은 환경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사회적 책임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주주가치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은 단기주의의 함정으로 인해 오히려 불리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가가 하락해 주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 상황에서 기업이 추구해야 할 방향은 분명해진다. 장기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려면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환경 문제와 같은 사회적 쟁점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환경을 오염하는 기업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 것이고 이는 곧 기업의 주가에 반영될 것이기에 주주들에게도 손해가 될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기업의 경영 활동과 별개의 자선행사나 기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업 경영 자체에 사회적 책임이 반영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하다. 나머지 자선이나 기부는 대주주의 몫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이자 현재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빌 게이츠의 경영 철학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한국의 기업들과 대주주들에게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했다. 그는 몇 년 전 다보스 포럼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 내용을 두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격렬하게 토론했다. 이 토론 내용은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저서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기업가정신에 바탕을 둔 기업의 진정한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는데 기업은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적 인정(social recognition)을 인센티브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런 기업들이 주축을 이룬 것이 바로 창조적 자본주의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빌 게이츠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일찍이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언급했던 인간에 내재하는 ‘칭찬받고자 하는 본성’, 그리고 ‘공평한 관찰자’ 개념과도 연관된다. 예컨대 환경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비단 기업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렇지만 생산의 주체로서 기업은 환경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쟁 기업들이나 언론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기업의 전문경영자나 대주주는 이를 알고 있기에 내심 편치 않을 것이다. 그들 내면에 있는 공평한 관찰자가 자신들의 행동을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환경오염을 예방하는 행위를 하고 이로 인해 비용이 상승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칭찬 받을 수 있다면 능히 그리할 개연성이 높다. 빌 게이츠나 애덤 스미스가 장려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다.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보다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호소하도록 간접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오랫동안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본질과 관련해 우리나라 대기업 오너나 전문경영자들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영환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이사

  미시경제학 등 다수 출간

오피니언타임스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칼럼으로 세상을 바꾼다.
논객닷컴은 다양한 의견과 자유로운 논쟁이 오고가는 열린 광장입니다.
본 칼럼은 필자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론(nongaek34567@daum.net)도 보장합니다.
저작권자 © 논객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